황금빛 우산 뒤로는 집사들이 향나무로 만든 염주, 수놓은 손수건,
양치 그릇, 먼지떨이 같은 일용품들을 들고 따라왔다.

그들이 지나가자 여덟명의 태감들이 봉황새가 수놓은 황금빛 가마를
메고 느릿느릿 다가왔다.

그 가마가 영국부대문 앞에 이르자 대부인을 비롯한 가씨 가문 부인들이
황급히 길가로 나와 꿇어앉았다.

태감들이 달려와 대부인과 형부인, 왕부인들을 부축해 일으켰다.

가마는 대문 안으로 들어가더니 종문을 거쳐 동쪽으로 더 들어가
안쪽 르락에서 멈추어섰다.

뜰에는 각가지 빛깔로 만든 정교한 명주 꽃초롱들이 훤하게 밝혀져
있었다.

"체인목덕" 이라는 네 글자가 편액처럼 적혀 있는 초롱도 있었다.

체인목덕이란 인덕을 베푸시니 그 덕을 온몸에 덧입는다는 뜻이었다.

안내를 맡은 태감이 가마 앞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아뢰었다.

"귀비마마, 옷을 갈아 입으시지요"

궁녀인 소용과 채빈이 가마 문을 열고 후비의 손을 잡아 가마에서
내리게 하였다.

후비의 의상과 용모는 차마 눈이 부셔 올려다보지 못할 정도였다.

후비 원춘은 궁녀들이 이끄는 대로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은
다음 다시 가마를 타고 후비별체 원내로 들어섰다.

이 순간을 위해 가씨 가문 사람들은 후비 별채를 짓느라고 얼마나
마음을 쓰고 고생을 했던가.

당당 딩당당 디디디 당당.

향기로운 연기가 피어오르고 가지가지 꽃모양을 한 초롱불들이 곳곳에
켜져 있어 별천지인 것만 같은 원내에서는 풍악소리가 끊어질 듯 말듯
은은히 울리고 있었다.

원춘은 가마 안에서 원내의 화려하고 사치로운 풍경을 훔쳐보고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부모님들이 너무 무리를 하셨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안내를 맡은 태감이 또 가마 앞에 무릎을 꿇고 아뢰었다.

"잠깐 내리셔서 배를 타고 들어가셔야겠습니다"

배를 타고 들어가다니.

한껏 운치를 더하기 위해 마련한 순서겠지만 이것도 원춘에게는
부담스럽게 여겨졌다.

후비 원춘이 가마에서 내리니 바로 앞에 맑디 맑은 물이 용이 꿈틀거리는
모양으로 길게 띠를 이루고 있었다.

그 물가를 따라 양쪽으로 뻗어나간 돌난간에는 수정과 유리로 만든
여러가지 모양의 등잔불이 걸려 있어 그 불빛으로 인하여 마치 물위에
금빛 은빛 가루를 가득 뿌려놓은 것 같았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