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영진 < 본사 상임고문 >

노씨 비자금을 놓고 온 나라가 한달여 난리를 치르는 사이 불과 넉달전
일어난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은 국민의 뇌리에서 망각의 미로에 들어섰다.

더욱 1년전 성수대교참사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던가, 빛바랜 흑백사진이
됐다.

건망증이 한국인의 전유물은 아니다.

또 쓰레기의 부패같은 그런 망각작용이 있음으로 해서 인간은 과거를 잊고
오늘에 열중할수 있다.

일본속담에 "추문은 두달반 넘지 않는다"는 것이 있다.

모두를 얼른 잊자는 덕담은 아니다.

오히려 한국인의 건망증이 심해도 너무 심하다고 한탄하고 싶다.

근년 육.해.공.지하에서 대형참사가 단몇달 멀다하고 터질때 마다 국민은
경악했고 인재를 분개했다.

당국은 엄벌을 잠칭했고 대통령 총리가 나서서 사과에다 재발없기를 다짐
했다.

년년생아이에 젖먹이기 힘들듯 사고가 접종하니 한 사건을 오래 붙잡고
늘어지기 어려운 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소위 "통치자금"사건만은 건성으로 넘기지 말자.

그러기엔 그 후유증이 너무 깊겠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른다.

하지만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는가,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가에서
우자와 현자가 갈린다.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객관적 구체적으로 사고의 원인을 분석하는데서 부터 출발해야 한다.

사태판단(fact finding)연후에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의식 양면 대비를
해야 한다.

이번 비자금 사건을 살펴보자. 첫째 노씨가 어떤 돌팔매라도 감수하겠다고
하면서도 억울한듯 계속 남기는 여운, 바로 그것이다.

과거 전임자들이 해온 관례대로 했을 뿐인데 왜 하필 나만 가지고 이
망신을 주느냐는 항변이 분명 뼛속에 잠재해 있다.

규모건 방식이건 관례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는 뉘우침이 노씨에게서 보이지
않음은 유감이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예산에 없는 통치자금을 거두고 쓰는 일이
최소한 30년 소급하는 관례였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자유당 적산불하까지는 안가도 좋다.

3공때 소위 4인방이란 사람들이 외자도입 인가와 정부공사 낙찰에 고율의
수수료를 반공식으로 챙겨 당에 상납했다.

상당한 떡고물을 분배착복한 것도 당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둘째 대통령의 권한을 주변의 아부경쟁속에 무제한 키워오다가 드디어
초법적인 "통치권"을 관례로 굳힌 과오다.

72년 7.4남북 공동성명이 합의되는 과정에서 보안법을 뛰어넘어 북을 월경
접촉한 근거를 대통령의 통치권이라 합리화한 것이 시초다.

사실 그런 비상성 외교-국방분야에서는 외국에서도 대통령의 긴급권한이
인정되며 이견의 여지가 좁다.

그뒤 3.4.5공의 강력정권들이 이 전가의 보도를 막 휘둘러 댔지만 누구
하나 월권이라고 호루라기 부는 용자가 나오기 힘든 상황이었다.

셋째는 6.29선언으로 보통사람임을 내세워 당선한 노씨가 시대 달라진줄
모르고 손큰 짓을 한데 문제가 있다.

입바른 청렴타령과는 너무 동떨어지게 돈의 단위를 키운 점, 친인척을
애지중지한 끝에 헤프게 분재를 허용한점, 2세의 장래까지 욕심을 낸 점,
내주장에 휘말린 점등 하나하나 불거져 나온다.

넷째 노씨가문 야심파탄의 결정적 요건은 금융실명제다.

그게 없었다면 아무리 냄새가 진동하고 당국자가 심증이 갔다해도 저리
시치미 떼는 한, 무슨 수로 증거를 잡았겠는가.

다섯째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잘못된 사회가치관과 국민의식에서 찾아야
한다.

원인을 깊고 넓게 잡을수록 책임분산을 돕고 한두 사람에게 죄 씌움에
자칫 퇴로를 만들어 주기 쉽다.

그러나 그리 쉽게 노씨의 죄가 경감될수는 없다.

재발방지책 모색에서 흔히 제도와 의식중 어느 것이 중요하냐 다투다가
두마리 토끼 다 놓치는 상습을 막으려면 양쪽 다 갖춰야 한다.

단도직입으로, 경제가 아무리 성장했고 국제화에 세계화가 겹쳤다 해도
한국인의 의식구조가 그에 상응하려면 아직도 요원하다.

인성에서 성취욕 친화욕을 제외한 3대욕망을 권력 명예 재물욕이라 한다면
한국인은 그중 어느 하나로 만족하는게 아니라 셋전부 아니면 적어도 둘은
가지려 머리쌈을 한다.

그래 온갖 수단 써서 대통령했으면 무쌍의 영광인데도 몇백년 쓰고 남을
거금에, 후손의 영화마저 독식하려 했으니 저 꼴이 될수 밖에...

시각을 좁혀보면 대통령이 통치자금을 쓰지 않으면 밑에 얕뵈고 헐뜯기듯
진짜 보통사람들에게도 원리상 같은 고민이 있다.

경조사 찬조금이다.

아무리 줄여도 생활에 주름이 가지 않을수 없게끔 사회에 발을 디딘
사람에겐 청첩장이 사정없이 날아든다.

상부상조라 자위하고 낑낑 따라 가다가도 악순환을 나부터 끊어 본답시고
청첩을 줄여 발송하는 만용을 냈다간 자식혼인에 "부의금"받는 봉변을
각오해야 한다.

내미는 떡값을 섣불리 사양하기도 힘든 세태다.

인맥이 달라 안 받는다거나 봉투가 얇아 퇴했다는 오해를 산 실례가 있다.

결국 적당히 썩고 적당히 즐길줄 알아야 출세도 하고 가장자격도 있다.

의리의 배신은 절대금물이다.

의리란 연분닿는 인간관계는 무조건 존중하고 배타적으로 봐주는 폭력계의
의리와 똑같다.

지연 학연 혈연 순이다.

이런 사회현상을 그대로 두고 노씨 사건 재발을 막기란 불가능하다.

당장 연말 총선을 앞둔 정가에 돈이 말라 갑자기 개별 후원회 모임이 성행
한다.

그나마 연줄 넓은 정치인 아니면 이제 정치 그만둬야 한다.

높은 사람은 비자금 핑계로 축재하고 백성은 경조사 비자금으로 울어선
안된다.

대오없인 힘들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