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전대통령이 검찰에 소환되는 광경을 지켜본 많은 국민들은 말할 수
없는 착잡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어쩌다가 이런 처참한 상황이 되었는지 더이상 외국 나들이를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다.

국민의 어버이요, 국가의 기둥이랄 수 있는 전직 대통령이 존경의 대상은
커녕 동네북이 돼버리고 말았다.

이런 참담한 상황이 계속된 이후 프랑스의 드골 전대통령이나 샤스트리
전 인도수상을 생각하는 버릇이 생겨났다.

드골은 청렴결백하였을뿐 아니라 여자 스캔들도 없었고 심지어 그의
고집불통에도 불구하고 정적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다.

네루이후의 인도를 이끌었던 샤스트리도 국방장관을 10년이나 지냈고
수상까지 역임했음데도 불구하고 죽고나서 보니 초라한 임대주택밖에
없었다고 한다.

인도와 같은 대국에서 오랫동안 국방장관을 지냈다면 마음만 먹을 경우
천문학적인 재산도 모았을 것이다.

세계 각국에는 드골이나 샤스트리보다 결코 뒤지지 않는 정치가들이
존재하고 있건만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들은 누구하나 해피엔딩으로 끝난
사람이 없다.

재임중에 수많은 문제점들을 야기시키기도 했지만 후임자의 전임자에
대한 한많은 사연도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전임 대통령의 소환에 이어 그룹 총수들이 매일 서초동 검찰청사에 불려
다니는 것을 볼때 후련한 복수의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경제를 생각할 때 무거운 마음이 앞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잘 걷기도 어려운 70대의 고령회장으로부터 40대초반의 젊은 회장까지
줄줄이 소환당하는 광경을 볼때 초기의 스트레스 해소감정은 일말의
불안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정경유착.우리가 수없이 들어본 말이다.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유럽을 지배하던 중상주의하의 상업자본주의
시절부터 권력과 돈은 이권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공생관계를 유지해 왔다.

우리 몸에도 어느정도의 세균 침입은 오히려 저항력을 키워 줘 더욱
튼튼한 몸을 가지게 만들 수 있지만 정도에 지나친 병균의 유입은 결국
죽음을 초래한다.

따라서 적당한 선의 정경유착은 역사적으로 항상 존재하여 왔으나 최근
우리나라의 상황은 너무 심한 경우에 이르렀다.

그러나 모든 그룹들에게 똑같이 돌팔매를 던질 필요는 없다.

역대정권으로 부터 엄청난 특혜를 받아온 기업들은 어떠한 희생이
따르더라도 처벌을 해야 하지만 기업가 정신으로 국가경제의 초석역할을
해온 대다수 제조업체들은 하루빨리 정상적인 경영활동에 매진할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

노태우씨의 비자금 문제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수많은 거짓말과 5.18을
생각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분노했으나 최근 정국이 경색되고 사채
시장이 얼어 붙었으며 많은 중소기업들이 도산위기에 처했다는 얘기들을
듣게 될때 상경계통 교수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나라 경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침체국면으로 치닫고 있는 경기이외에 정국경색과 대선자금 공개가 가지고
올 엄청난 파장을 고려할 때 또다시 79년의 부.마사태나 80년 5월의 광주
사태와 같은 민족의 비극이 재현될까 심히 두려움이 앞선다.

우리나라는 5천년 역사에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단일민족 단일언어
단일문화의 자랑스런 전통을 가지고 있다.

여러 다른 민족과 언어, 그리고 이질적인 문화로 이뤄진 나라들도
2000년대에 살아 남겠다고 처절한 생존전략(예를들면 말레이지아등)을
수립하고 있는 이때 우리는 부실공화국, 뇌물공화국이라는 슬픈 오명을
쓰게 됐다.

남을 탓하기 전에 우리자신들을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최근 일본 총무처장관이 망언파동으로 사퇴했는데 맹목적으로 비난할게
아니라 일본이 19세기 후반이후 공업화의 기틀을 확립할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반성해야 한다.

최근 정치가들이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조장하는 지역갈등, 그리고 팔이
안으로 굽는 꼴인 인사정책등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또다시 19세기말 20세기초의 독점자본주의하의 제국주의 시대와 같이
열강들의 희생물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노씨의 비자금이 매일 속속들이 파헤쳐질때마다 정경유착의 고리를 가능한
차단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며 난맥상과 탁류에 휩싸인 한국
정치판에 대해 거부감이 엄습한다.

노태우씨가 대선자금및 비자금의 사용처를 공개하는 경우 과연 그물에
걸리지 않을 깨끗한(덜썩은) 정치인이 몇명일까 의심이 된다.

그러나 정치판은 정치꾼에게(찾기는 어렵지만 비교적 깨끗하고 양심적인)
맡겨야지 또다시 군인들이 등장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서는 안된다.

벌써 한달째 계속되는 비자금문제가 처음에는 흥분과 분노, 그리고
절대적인 관심의 대상이 됐으나 지금에 와서는 국민들도 조금씩 지루해햐는
감이 없지 않다.

앞으로도 밝힐 것은 철저히 파헤쳐야 하지만 건전한 기업경영을 해온
사람까지 "정치권력과 야합해서 돈을 벌었다"고 하는 가진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증오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또한 기성정치인이나 신진정치인 중에서도 뚜렷한 정책과 소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틀림없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 모든 정치인이 떡고물이
뭍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다만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기고 경제는 기업인이 주도하며 군인들은
국방의 일에만 전념할 때 TV드라마 "제4공화국"이나 "코리아게이트"를
보면서 흥분하는 상황은 없을 것이다.

국가의 장래를 위해 발리 일을 확실하게 마무리 짓고 다가오는 96년은
선진한국 창조를 위한 대화합의 원년이 되기를 기원한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