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옥은 가위를 들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바느질상 옆 방바닥에
놓여 있는 향주머니를 집어들었다.

"아니"

보옥이 말릴 사이도 없이 대옥이 그 향주머니를 가위로 싹둑싹둑
베어버렸다.

그 향주머니는 보옥의 부탁으로 대옥이 만들고 있던 것인데, 반쯤
완성된 그것은 얼핏 보아도 정성과 기교를 다한 흔적이 역력하였다.

"이 아까운 것을"

보옥이 몇 동강으로 베어진 향주머니 조각들을 집어들고 울상을 지었다.

"아깝긴요.

남의 정성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이런 물건을 만들어줄 필요가 없어요"

대옥은 바느질상 위에 가위를 내려놓으며 여전히 샐쭉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봐, 보란 말이야!"

보옥이 갑자기 고함을 지르며 옷섶을 헤치더니 붉은 속저고리를 보였다.

왜 저러나 하고 대옥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니 보옥이 그 속저고리에서
염낭을 꺼내어 들었다.

그것은 대옥이 보옥에게 선물로 주었던 바로 그 염낭이었다.

"대옥이가 나에게 준 선물을 어떻게 남에게 줄 수 있겠어?"

보옥의 그 말에 대옥은 몸둘 바를 몰랐다.

사정을 잘 알아보지도 않고 성깔을 먼저 부린 자신이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둘이 서로 화해를 하고 보옥의 어머니 왕부인이 거처하는 방으로
건너오니 마침 가장이 고소지방에서 사가지고 온 극단에 관한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가장은 열두명의 여자애들을 사오고 그 여자애들에게 연극 연습을
지도해줄 선생까지 모시고 왔다.

영국부에는 옛날에 배우노릇을 하던 노파들이 있었는데, 그 노파들이
새로 온 여자애들을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가장은 연극에 쓰일 각종 의상이며 도구들을 잔뜩 준비해가지고
왔다.

"우리 이향원으로 연극 연습하는 거 구경하러 갈까요?"

왕부인이 다른 부인들을 돌아보며 제안을 하였다.

설씨 가족이 기거하던 이향원은 설씨 가족이 동북쪽에 있는 한적한
집으로 이사를 갔기 때문에 비어 있었는데, 이번에 연극 연습장으로
쓰이게 된 것이었다.

보옥과 대옥도 신이 나서 사람들을 따라 이향원으로 가서 열두명의
여자애들이 연극 선생의 엄한 지도를 받아가며 연극을 연습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그렇게 구경을 하면서 보옥과 대옥이 서로 눈길을 주고 받으며 은밀히
미소를 흘렸다.

그 광경을 훔쳐본 보채가 시기심으로 두 눈을 번뜩였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