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운 < 한양대 명예교수 >


노태우씨가 사과를 했다.

그러나 그 내용에 있어서 아무도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본인도
진실한 반성은 아니었다.

우리는 어느시대를 막론하고 끈질기게도 거의 같은 패턴을 되풀이해 오고
있다.

6공화국이 출범한지 얼마 안돼 대통령의 인척이자 재략이 많기로 이름난
최고 참모였던 박철언씨가 출국한 일이 있다.

그런데 그가 공항을 떠나는 모습에서 30년전 5.16의 최고 참모였고 대통령
의 인척이기도 했던 김종필씨가 당시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속에서 일단
판정패하고 외유를 하면서 했던 "자의반 타의반"이란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두사람이 똑같이 "본의아닌" 외유를 하기전까지의 경력을 훑어 보아도
매우 흥미있는 공통점이 눈에 띈다.

우선 전자는 제6공화국 탄생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후자는 5.16군사혁명의
주역이었다.

둘다 최고 권력자의 일급 참모였을 뿐만 아니라 권력체제내의 직책도 비슷
했다.

정치검사 대 정보장교, 안전기획부 특보 대 중앙정보부장, 최고권력자의
처사촌과 조카사위라는 사실이 번갈아 떠오른다.

김영삼대통령의 영식인 현철씨의 영향력이 자주 거론되는데 전두환
전대통령시대 그 친동생이 한 역할이 연상된다.

말하자면 이같이 유사한 현상들은 권력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역학구조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TK니 PK니 하는 지역차별은 더욱 심해졌다.

사회적 분위기는 자연치유가 불가능하며 국민적 차원의 굳은 개혁의지가
있어야 됨을 실감했다.

5.16군사혁명 당시 소장 장교들은 장군들을 "똥별"이라고 했다.

해방직후 국방경비대 시절에 입대해 학력 경력도 없으면서 군이 급격히
성장하는 바람에 별을 단 무능한 장군을 욕하는 소리였다.

그러나 혁명주체가 별을 달게 되자 4년제 정규사관학교 출신의 장교들이
그들을 "똥별"이라고 했다.

자기들이야말로 4년제의 진정한 장교이고 1세대 2세대 "똥별"들을 싹쓸이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실상은 스스로의 손으로 자신의 어깨에 붙인 이들 정규 사관학교
출신의 별들은 오히려 "똥별"이 돼 버렸다.

국민국가의 사관학교라면 어느 나라에서나 민족과 국가의 자랑이자 엘리트
이다.

이들에게는 난국에 앞장서야 하는 지도자의 책임의식과 귀족정신(Noblesse
Oblige)이 중요한 덕목이다.

귀족정신이란 동양적인 말로 백성에 앞서 나라일을 걱정하고 백성이 즐긴
다음 낙을 찾는 "선우후락"이다.

이 정신이 없는 지도자는 마적 두목이나 다름없다.

귀족정신은 없고 싹쓸이적인 사고가 만연한 결과 한국병은 증폭돼온
셈이다.

싹쓸이 권력독점 세대교체를 자랑하는 이도령적인 사고는 항상 같은
되풀이가 따른다.

권력자의 이도령적 사고가 이 나라를 병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정보화 다양화 국제화사회를 지향하는 오늘날의 상황에 비춰 볼때 이도령적
가치관은 매우 부정적이다.

그 내용을 따져 보면 다음과 같다.

"이도령은 장원급제했다"는 말에는 권력지향적인 사고가 깔려 있다.

"고향에 내려갔다"는 금의환향이기도 하지만 지역차별을 엿볼수 있다.

"춘향이부터 구했다"에는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친인척 애호사상을 읽을
수 있다.

"변사또를 시원스럽게 처리했다"는 결국 싹쓸이를 말한다.

이도령이 그후 어떻게 됐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아마도 변사또처럼 탐관오리가 되지는 않았을까.

5.16직후 냉장고 두개를 가졌던 재무장관을 부정척결의 대상으로 삼았으나
JP는 수백억원, 그후에는 천문학적인 수천억원, 쿠데타가 있을때마다 부패는
더해 갔으며 드디어 노씨는 엄청난 돈을 긁어 모았다고 한다.

모두가 진정한 의식개혁이 없었던 싹쓸이의 대가이다.

정보화시대에 걸맞는 의식을 갖는 것만이 한국인의 살 길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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