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6년 봄 경복궁을 수리할때의 일이다.

당시 성종은 제비나 참새떼들이 건물의 단청을 더럽히고 목조건물을
파괴하는 것을 막기위해 사정전 처마밑에 철망을 치도록 했다.

아마 이것이 건물 처마에 철망을 씌운 최초의 일이 아니었나 싶다.

그때 동부승지로 있던 홍귀달은 공역이 어렵고 사치스러우며 화려한
것이 지나쳐 후세에 "말류의 폐단"을 보여주는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반대했다.

그러나 성종은 큰 건물을 자주 수리할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홍귀달의
건의를 묵살해 버렸다.

선왕들이 지어놓은 건물을 오래 보존하고 싶었던 마음을 읽게 해주는
대목이다.

"문종실록"에는 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충청도 직산에 있는 백제시조묘가 오래돼 허물어지려하니 소재지인
직산과 인근의 각 고을로 하여금 협력해서 수리하게 하자는 예조의
건의를 받고 수리를 서두르도록 했다는 내용이다.

이밖에 세종이 잠저에 있을때 부친에게 그려준 란죽8폭을 신석조가
병풍으로만들어 문종에게 바치자 "참으로 보기힘든 보배"라며 내탕고에
잘 간직하도록 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그무렵에는 또 해남현감인 금이성이 밭을 갈다가 얻은 신라금동불
1구를 바치자 의복한 벌을 내려주며 치하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문화재"라는 개념조차 몰랐던 500여년전 옛 사람들도 이처럼 선인들의
유물은 중하게 여겨 보호하려 애썼다.

문화재관리국의 안전점검결과에 따르면 국보1호인 "남대문"과 보물1호인
"동대문"을 비롯,보물3호인 "원각사비"등 서울시내 각종 문화재의
헤손이 극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동대문은 화강석구조물이 북쪽으로 6~7 나 기울어져
있고 홍예부문에 균열이 생겨 그대로 방치할 경우 붕괴등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진단이다.

600년 고도인 서울의 정동문인 "흥인지문"이 기울뚱해져 무너 질
위험이 있다는데도 관리주체인 구청은 예산과 전문인력부족을 내세워
책임을 정부에 떠맡기려하고 있고 정부는 책임소재만 따지려들고
있는 실정이라니 "국보"니 "보물"이니 하는 명색조차 한없이 초라해
보인다.

국보도 보물도 아닌 지방의 백제시조묘를 보수하는데도 조정은
물론 소재지인 직산과 인근고을이 모두 협력했다는 짤막한 옛 기록이
한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