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옥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옛사람들의 글에 이르기를, 새것을 엮는 것은 옛것을 그대로 쓰는
것만 못하고 옛것을 새겨두는 것은 새것을 새겨두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새로 이름을 짓기보다 옛 시구절을 하나 적어두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어떤 시구절로 이름을 삼고 싶은가?"

가정이 넌지시 물어보았다.

문객들은 보옥의 입에서 어떤 구절이 나오나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기다렸다.

"곡경통유처라는 옛 시구절이 있습니다.

그 구절을 이름으로 삼아 써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아무 이름도 써두지 말고 저 바위 그대로
두는 것도 풍취가 있을 것 같습니다"

곡경통유처라는 말은 구불구불한 길 너머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가정은 속으로 보옥이 제법 그럴 듯한 이름을 지어냈다고 생각하면서도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왜 곡경통유처라는 이름을 생각해내었느냐? 그 이유를 설명해보려무나"

"네, 말씀드리지요.

이곳은 별채 원내의 중심도 아니요,더군다나 배경을 이루는 풍광도
아닙니다.

그저 들어가는 입구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사실은 이름을 붙일 만한 곳이 되지 않지만, 구태여 이름을
붙이자면 곡경통유처라 하는 게 좋겠다는 것이지요"

"그것 참, 그럴 듯한 이름이군요"

문객들이 보옥이 지은 이름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떤 문객은 보옥이 가정의 아들이라는 점을 감안해서인지 필요
이상으로 아부를 하기도 하였다.

"자제분께서 어쩌면 이렇게 문재가 뛰어나십니까.

썩은 글이나 읽고 있는 우리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러나 가정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슨 그런 과찬의 말씀을. 이 아이는 한가지 아는 걸 가지고 열가지나
아는 것처럼 으스댈 뿐입니다.

그러니 이 아이의 말을 그저 하나의 웃음거리 정도로 여기고 그렇게
괘념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보옥을 칭찬했던 문객들이 머쓱해지고 말았다.

보옥은 얼굴이 확 달아오를 정도로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그래도
몇몇 문객들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니 은근히 기분이 좋기도 하였다.

아버지 가정으로부터 칭찬을 듣는다는 것은 아예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으니까.

아마 보옥은 일생동안 아버지의 칭찬을 한번도 받아보지 못할지도
몰랐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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