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위에 보이는 그 바위는 산의 이름을 새겨넣기 위한 일종의 편액
구실을 할 모양이었다.

어느 문객이 그 산 이름을 첩취(첩취)라고 짓는게 어떻겠느냐고 하였다.

첩취는 첩첩한 푸른 산이라는 뜻이었다.

보옥이 옆에서 그 이름을 듣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체, 저게 왜 첩취야? 축산이 하나 큼직하게 있는 것 뿐인데 첩첩
좋아하네. 이름도 되게 못 짓는군"

또 다른 문객이 말했다.

"금장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금장은 비단 병풍을 두른 듯한 산들이라는 뜻이었다.

보옥이 또 그 이름의 허점을 꿰뚫어 보았다.

"병풍이라는 것은 어떤 풍경을 둘러싸고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지
저렇게 오히려 풍경을 가리는 역할을 하는 축산을 두고 금장이라고
하다니"

또 한 사람의 문객이 자기도 이름을 지어보았다.

"새향로는 어떠합니까?"

새향로는 향로보다 더 나은 봉우리라는 뜻이었다.

그 문객은 그 산에서 향로의 모습이나 향기를 느낀 것일까.

보옥은 그 이름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종남이라고 하면?"

한 문객이 말하자 보옥은 또 속으로, "종남산을 왜 여기에 끌어다
붙인담" 하며 못마땅해 했다.

가정도 문객들이 내어놓는 이름들이 한결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고개를 약간 숙이고 가만히 듣고 있기만 하였다.

그러더니 보옥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보옥은 드디어 아버지가 별채 원내로 들어와 놀았던 자기의 죄를 묻는
것인가 하고 바짝 긴장하였다.

그런데 가정의 얼굴에 의외로 다정한 웃음이 번지는 것이 아닌가.

어, 아버지가 나를 향해 미소를 지을 때도 있네. 보옥이 얼떨떨하여
몸둘 바를 몰랐다.

"보옥아, 너는 저 산의 이름을 무엇이라 붙였으면 좋겠느냐?"

아버지기 나보고 따라오라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구나.

보옥이 그제서야 깨닫고 더욱 긴장하게 되었다.

여기서 문객들보다 더 나은 이름을 지어 아버지에게 한번이라도 인정을
받아보고 싶은 보옥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가정과 문객들이 서로 짜고 별로 좋지 않은 이름들을
먼저 내어놓아 보옥이 그것들을 어떻게 생각하나 시험을 해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보옥이 침을 한번 꿀꺽 삼킨후 심호흡을 하며
마주 하고 있는 산을 올려다 보았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