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식 "집체경영"과 미국식 "합리경영".국내에 산업이 본격 형성된
지난 50여년동안 한국 기업들은 이들 두가지 방식을 "텍스트"로 삼아
경영시스템을 끊임없이 개량해왔다.

70~80년대에 절정을 이뤘던 TQC(종합품질관리)운동은 "메이드 인 재팬"을
직수입한 대표적 경영혁신 운동이었다.

반면 요즘 재계에 리스트럭처링의 방편으로 붐을 이루고 있는 비즈니스
리엔지니어링(BPR=사업 구조개편)은 미제수입품이다.

요샌 "벤치 마킹"이란 미국 기업들의 최신 혁신기법이 물밀듯이 수입되고
있다.

최근 모대기업그룹 회장은 사장단회의에서 각 계열사별로 미국 유럽 등의
"선진 초우량기업"을 하나씩 골라잡아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으라는 엄명을
내리기도 했다.

인사 조직 재무 마케팅 등 분야별로 월별 분기별 벤치마킹 건수를 목표로
정해 "달성"하라는 지시까지 시달했다.

한마디로 요즘 국내 기업들의 경영혁신에 관한 한 "미국식"이 "일본식"을
완전히 메쳐낸 듯한 분위기다.

미국 월 스트리트 저널지는 얼마전 "한국 기업들이 능력별 성과급 제도와
과감한 해고 등 미국식의 파격적인 경영방식을 다투어 도입하고 있다"며
"이런 노력은 일본과의 경쟁에서 한국이 앞서나갈 수 있게 도움을 줄
것"이라고 "진단"하기도 했다.

저널지는 이같은 한국 기업들의 미국식 경영기법 도입 붐에 대해 "기존의
구태의연한 경영으로는 생산성 향상은 커녕 외국 기업과의 경쟁에서 이겨낼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한 데 따른 것"이라며 "미국식 경영기법 도입은 주로
2세경영인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서구식 합리주의를 추구하는 미국식 경영혁신과 동양적 조화를 중시하는
일본식 경영.이 중에서 어느 쪽이 한국기업들에 보다 적합할까.

자유기고가 이동욱씨는 최근 국내의 한 월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건설업계와 한국전력 원전사업장간의 비교를 통해 그 답을 모색했다.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등의 대형 붕괴사고가 잇따르는등 국내
토목.건축업계의 상당수가 "불실"의 대명사처럼 손가락질받고 있는 와중에,
거꾸로 한국의 원전만은 "안전"의 대명사로 꼽히고 있는 게 그가 추적한
"의문"의 단초였다.

실제로 한국의 월성 령광 등 원자력발전소는 93년이후 <>이용률 세계 1위
<>안전도 세계 2위를 차지하는등 17년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안전한 사업장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가 찾은 해답을 단순화하면 "한국의 건설업계는 대부분 일본식 TQC에
의존하고 있는 반면 원자력발전소는 미국식 품질관리 기법을 도입해
운영하고 있는데 따른 것"으로 정리된다.

쉽게 따지자면 일본식 경영기법은 "종업원들은 소속 기업에 절대 충성할
수 있다"는 명제를 전제로 이뤄져있다.

반면 미국식 경영은 "사람"을 전적으로 믿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실수할 수 있고, 반드시 실수한다는 전제를 깐다.

때문에 미국식 품질관리는 개인의 충성심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
전반을 시스템으로 연결시켜 운영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사실 지난 20여년간 한국의 기업들은 건설업계 만이 아니라 대부분 일본식
TQC체제를 별다른 가감없이 도입.적용해 왔다.

품질 향상을 위한 경영 측면에서의 이같은 적용은 한때 "제로 디펙트
( Zero Defect =무결점주의)"운동 등 산업 전반에 걸쳐 품질 개선 노력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 파장엔 한계가 있었다.

TQC 도입이 품질 향상과 수출 증대에 기여해왔다고는 하지만 산업계
전반에 고루 확산될 정도는 되지 못했다.

이처럼 TQC가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적용되지 못한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기업들이 일본식 품질관리 체제를 한국의 고유한 기업문화나
국민성에 맞게끔 조율하지 않고 그대로 직수입한 데서 그 원인을 찾는다.

일본식 품질관리 체제는 설계.제조.검사에 한정지으며 각각의 분야가 서로
분리돼 있는 비시스템적 특징을 갖는다.

이것은 일본의 독특한 공동체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모든 라인이 충성심 강한 근로자들로 채워질 때 제대로 효과를 낼 수 있다.

그것도 "위를 향한" 한국식 충성심이 아니라 자기 분수와 영역을
지키는 일본식 충성심으로 말이다(김일섭삼일회계법인 대표).말하자면
한국 기업들은 이같은 "일본적 인프라"를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적
기법"을 도입했던 데 실패의 원인이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요즘 기업들이 미국식 기법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데는 "일본식의
한계"에 대한 반성이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일본기업들 조차도 연공서열제 종신고용 같은 스스로의 경영방식을
파기하고 있는 와중이다.

그렇다면 BPR로 대변되는 미국식 경영혁신 기법이 "지고.최선"일까.

물론 답은 "아니다"다.

삼일회계법인 김대표는 "일본기업들의 TQC가 일등전략이었다면 BPR는
일등이 된 기업을 따라잡기 위한 "이등전략"일 뿐"이라며 "미국식 기법에
대한 비판적 수용이 전제돼야 과거 일본기법 직수입에서 비롯됐던
시행착오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더구나 BPR는 본고장인 미국에서조차 반드시 성공적이지 만은 않은 상태다.

리엔지니어링의 창시자로 꼽히는 미국의 마이클 해머 박사는 이에대해
"원래 리엔지니어링과 다운사이징(감량경영)은 완전히 상반된 개념인데도
대부분 기업이 비용을 절감하고 생산성을 향상시킬 욕심으로 대량 해고를
일삼고 있다"며 "리엔지니어링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기업의 영양실조를
몰고와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해머박사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미국에서조차 성공적이지 못한 BPR를 한국
기업들이 무분별하게 도입.적용하는데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미국 MIT대의 앨리스 앰스덴교수(여)는 "미국식 경영이론은 어디까지나
미국적 문화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며 "한국기업은 외국의
최신 경영이론에만 지나치게 매달리지 말고 한국기업이 과거에 이룩한
성공사례를 보다 철저하게 연구해 스스로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경영방식을 발굴해야 할 것"이라고 충고한다.

"한국적 경영혁신의 토착화"를 위해 신들메를 고쳐 매야 할 시점이란
얘기다.

< 이학영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