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은 머리로 구상하고 글을 짓고 하는 데는 남다른 소질이 있었으나,
별채공사와 같이 육체노동이 개입되는 일에는 한걸음 물러서 관망만 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가정으로부터 일을 맡은 사람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일을 할 수
있었다.

가정의 형 가사 역시 공사현장에는 별로 나와 보는 일이 없이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불러들여 이것 저것 물어보기도 하고, 자기 생각을
종이에 글로 적어 전달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도 책임을 맡은 가련과 가진, 집사 뇌대, 내승, 임지효, 오신등,
첨광, 정일흥등은 현장을 뛰어다니며 인부들을 감독하고 지휘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가용은 각종 금은 세공품을 만드는 일을 맡았다.

보옥은 집안에서 별채를 짓느라고 야단법석이 벌어지는 통에 아버지가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하지않아 은근히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 진종이 여승 지능의 일로 자기 아버지 진업에게 매를 맞고
앓아 누운 이후로 병석에서 일어날 줄 몰라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중에 진종의 아버지 진업이 먼저 홧병으로 숨을 거두고 말아 진종의
병은 더욱 위중해지는 것 같았다.

한편에서는 모두들 들떠서 후비 성친을 위해 별채를 짓는다고 부산한데,
진종의 집안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보옥은 이쪽 저쪽을 왔다 갔다 하며 자꾸만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별채 공사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진종의 집안 문제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아무리 화려하게 누각을 짓고 산을 쌓으면 무엇하나.

진종의 아버지처럼 쓰러져 저 세상으로 가면 그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축산을 하느라고 갖다놓은 기암괴석 하나라도 손에 쥐고 갈 수 없지
않은가.

아무래도 멀지않아 진종도 자기 아버지를 따라갈 것만 같았다.

이런 생각들을 하며 별채 공사현장을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시종 명연이
달려와 보옥에서 급히 말했다.

"진종 도련님 상태가 갑자기 안 좋아졌대요.

방금 그 댁 늙은 하인이 이르고 갔어요" 보옥이 명연과 함께 수레를
잡아타고 진종의 집으로 달려갔다.

대문 근처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몇몇 진종의 친척들이 진종을 둘러싸고 있었다.

진종은 이미 두서너번 혼수상태에 빠져 구들바닥에서 침대로 옮겨져
있었다.

침대 주위로 대발을 쳐두어 꼭 빈소같은 느낌이 들었다.

보옥이 그 광경을 보고는 엎어지듯이 다가가 크게 소리내어 울었다.

"진종아, 죽으면 안 돼! 염라대왕님,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동무를 제발
데려가지 마십시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