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회든 다양한 모임이 있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여로 모임에 속해 있기 마련인데
친목회나 취미생활을 위한 동호회 동창회 연구회등 그 수조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활동력이 왕성한 어떤 이의 경우,물경 예닐곱개 이상의 모임에 관여
하면서 각종 경조사나 친목모임에 얼굴을 내미는데 보는 사람의 숨이 막힐
때도 있다.

원래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고 취미하고 내세울 만한
것도 별로 없는 내 형편에 그저 식구들하고 함께 모처럼의 외출에서도
신바람이 났고 회사에서 직원들과 한잔 하면서도 즐거움을 찾는 나였으므로
여러 모임에 이끌려 연말만 되면 망년회 일정이 끊이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한 느낌까지 든다.

그런 나에게 유난히 애착을 갖게 하는 모임이 하나 있기는 하다.

속칭 "삼팔 따라지"에서 따온 삼팔회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 삼팔회는 경기고를 졸업한 서울대학교 72학번들로 상대 경영학과
A반 출신의 11명이 모임을 갖게 되면서 시작되었는데 초기엔 아무런 모임
명칭도 없이 만나면 좋고 좋은 기분으로 지내다가 누군가 장난삼아 우리
열한명의 학번을 일일이 더해보고 그 숫자가 3백80이 나왔다며 삼팔회로
하는게 어떻겠느냐고 너스레를 떨어 우리의 애칭이 되고 말았다.

모임 이름이 이처럼 털털하고 소박해서인지 우리의 만남도 아무런 부담도
없었고 편한 분위기가 되었다.

마치 고된 강의시간끝에 홍릉 캠퍼스의 "향상림"아래에서 막걸리와 낭만을
마시고 누리던 그때의 그 분위기가 고스란이 전해지는 느낌, 그 자체라고나
할까?

당시엔 모교수의 강의가 어떻다는둥, 누구의 걸 프랜드가 어쨌다는둥의
화제가 다니고 있는 직장과 가족들의 신변 이야기로 바뀐것 외에 우리는
너무나 달라지지 않았고 우리의 우정은 더욱 끈끈해지고 있다.

우리는 별일이 없으면 1년에 네차례는 정기적으로 만난다.

서로 다른 직장에서 생활하다가 우리는 어김없이 그 옛날의 "향상림"으로
모였고 잘 익은 술과 정다운 얘기를 저마다 한보따리씩 풀어놓고 시간가는줄
모른다.

회사에서 지칠줄 모르고 앞만 보며 달려온 우리들은 그날 만큼은 대학
1년생처럼 싱싱하게 파득거리며 재미있어한다.

직업 탓일까?

나는 양념처럼 잊지않고 내 친구들에게 묻는다.

"야.늬네 회사에 뭐 그럴듯한 호재 없냐?"

그 말에 늘 군밤을 먹이는 친구도 건재하다.

나는 이런 삼팔회를 너무 사랑한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