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남정 < 한일산업기술 협력재단이사 >

최근 일본 요미우리신문의 독자투고란을 우연히 읽고 한국기업이
일본시장에 어떻게 접근해야할 것인가 하는 해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일본 조후시공무원들은 고베지진이 발생했을때 구조지원차 현장에
달려갔다.

그들은 그곳에서 일본연수중인 한국의 모그룹직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자원봉사자로 구조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감탄했다.

양측은 복구활동이 끝난후 조후시에서 다시 만났다.

이때 한국기업측은 조후시내의 복지시설에 자사제품인 TV5대를 기증했다.

일본 독자는 한국기업의 이같은 활동에 대해 한마디로 감동적이었다고
표현했다.

한일양국 국민이 전후 50년을 맞아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고 있음을 실감케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일본인들은 작은 일에 크게 감동한다.

한국기업이 복지시설에 TV5대를 기증한 성의가 고베지진 자원봉사활동을
더욱 값지게 만들었다.

이같은 사례는 비즈니스에서도 적용된다.

일본인들은 무슨 일이든 처음부터 크게 시작하지 않고 성과를 봐가면서
키워나간다.

필자는 일본의 한 수입업자가 한국에서 쥐포를 수입하기 위해 4~5차례나
방한해서 상담을 진행한지 1년여만에 5,000달러어치의 오더를 내는 것을
본적이 있다.

그동안 쓴 여행경비에도 못미칠 듯한 주문량이었다.

그들은 이런식으로 비즈니스관계를 열어간다.

이런 일본에 대해 째째하다고 속단을 내려서는 대일경협에서 성공의
열쇠를 쥐기 어렵다.

오히려 시작부터 크게하고 보는 우리가 문제다.

필자는 지난10여년간 중소기업 대일수출지원사업을 다루면서 우리기업들이
첫 상담에서부터 몇만 달러의 오더를 받으려고 서두르는 바람에 실패하는
경우를 많이 봐왔다.

구미와 달리 소액주문을 내는 것을 보고는 한두번 타진한뒤 일본시장을
포기하는 사례를 적지않게 목격했다.

일본기업은 이러한 한국기업의 태도에 불만이다.

또 한국은 항상 일본에 무엇을 요구하기만하고 귀찮게 하기만 한다고
의식해왔다.

그러나 조후 시민에게 한국기업의 이번 사례는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번 일은 광복50주년을 맞이하여 앞으로 50년간 한일관계가 어떻게
이뤄져야 할 것인가를 생각케하는 좋은 사례가 된다고 본다.

이제는 우리부터 변해야 한다.

과거의 연장선상에서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상태의 대일관계를 떠올리는
방식은 청산해야 한다.

일본이 우리의 기대에 못미칠때면 곧바로 감정적인 대응을 하기에 급급한
우리의 자세를 바꿔야한다.

이제는 당당하게 일본을 상대하고 객관적으로 일본을 볼수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고베지진때 신속하게 자원봉사단을 파견한 것과 같은 한국기업의 정신이
사회 각분야에 널리 퍼져야만 대일피해의식을 발전적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전 와타나베 전외상의 망언으로 국내가 들끓었던 일이 있었다.

이러한 일본 우익정치인의 발언은 앞으로도 간헐적으로 이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발언을 놓고 우리측에서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면 한물간 보수정치인의
인기만 회복시켜줄 따름이다.

1억2,000만 인구가 사는 일본에는 각양각색의 사람이 살고있다.

일부 보수우익인사의 발언을 일본국민 전체의 생각으로 오인해서는
곤란하다.

실제로 한일간의 경제활동은 이런 정치인의 발언소동에 영향을 받지않고
해마다 증대되고있다.

이 순간에도 일본의 전문기술인력이 우리의 중소기업현장에서 비지땀을
흘리면서 기술을 전수하는데 여념이 없다.

우리 근로자와 똑같은 작업복을 입고 기름범벅이 되어 기술을 가르치고
있다.

저녁에는 기업의 식사초대도 정중하게 거절하고 그날 지도한 내용에 대해
검토하고 개선안을 마련하느라 새벽까지 연구한다.

이러한 민간차원의 각종 교류협력이 오늘날의 한일관계를 이정도의
수준으로 유지시키고 증대시켜나가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고 확신한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8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