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은 옷소매 속에서 부절을 꺼내어 보옥더러 그것을 희봉에게
건네주도록 하였다.

부절이란 나무쪽에 물품명세서를 적고 도장을 찍은 다음 그것을 둘로
쪼개어 주인과 창고관리자가 각각 지니고 있는 것으로 주인이 그 부절을
직접 들고 가거나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가져가게 하여 부절끼리 서로
맞추어보고 창고관리자로부터 물건을 받아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진이 부절을 희봉에게 준다는 것은 집안살림 일체를
맡긴다는 의미인 셈이었다.

그 의미를 아는지라 희봉은 감히 부절을 받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제수씨, 부절을 받으시고 집안살림을 하는데 무엇이든지 필요한대로
물품을 꺼내어 쓰십시오. 일일이 나에게 물어볼 것도 없어요.

그리고 밑에 있는 하인들도 댁에서 하는 것처럼 마음대로 부리십시오"

그런데도 희봉은 여전히 부절을 받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집안 일을 맡아달라고 하여, 그저 가진의 지시를 받아가며 일을 돕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모든 권한을 넘겨줄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희봉이 왕부인의 눈치를 보자 왕부인이 나서서 거들어주었다.

"아주버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시니 부절을 받아두려무나.

하지만 아주버님이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해서 네 뜻대로만 하지
말고 무슨 일이 있으면 아주버님이나 동서 형님과 상의해서 하도록
하여라"

왕부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보옥은 희봉의 손에 부절을 꼭
쥐어주었다.

부절을 받는 희봉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그러자 가진이 조금 여유를 가지고 희봉에게 물었다.

"그럼 제수씨는 여기 녕국부에 계속 머무르시겠습니까, 아니면 날마다
댁에서 여기로 오겠습니까?"

저건 또 무슨 소리인가.

왕부인은 가진이 혹시 희봉에게 수작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바짝 긴장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날마다 왔다 갔다 하려면 번거롭고 고단하실 텐데
아예 여기로 옮겨와서 당분간 눌러사시지요.

내가 집을 한 채 따로 내어드리겠습니다"

가진은 한 술 더 뜨고 있었다.

왕부인은 가진의 제안에 희봉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어요.

저의 집안 일도 제가 좀 돌보아야 하니 날마다 건너다니는 편이
낫겠어요"

왕부인은 속으로 가만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그렇지. 끈질기게 들러붙는 가서도 떼어낸 희봉이 아니던가.

(한국경제신문 1995년 8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