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숙장 가대유가 볼일이 있어 가서에게 학숙일을 맡기고 집으로
빨리 돌아왔다.

학생들에게는 칠언시 한 구를 써주면서 내일까지 대구를 지어오라는
숙제를 내주었다.

진종은 숙장이 없어 약간 어수선한 학숙 분위기를 틈타 항련에게
눈짓을 하였다.

마침 설반도 며칠째 학숙에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어 향련과
사귀기에 좋은 기회였다.

진종의 눈짓을 받은 향련이 소변을 보러 가는체 하며 진종을 따라나왔다.

둘은 일단 변소에 들렀다가 변소 뒷문으로 해서 호젓한 뒤뜰 한모퉁이로
갔다.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적절한 장소인 셈이었다.

진종이 향련의 손을 다정스럽게 잡으며 말했다.

"학숙에 입학한 첫날부터 너랑 사귀고 싶었어. 그런데 설반 때문에
마음껏 사귈 수가 없었어. 너도 나를 좋아하지?"

"응,좋아해" 향련이 목소리까지도 여자아이를 닮아 있어 진종은 온몸이
자리자리해졌다.

지금 당장 남색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이렇게 향련과 친해지다가는
언젠가 남색관계를 맺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은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창들이 수군대며 말하는 그 남색 행위가 어떠한
쾌감을 주는지 실제로 경험을 해보고 싶기도 하였다.

"너, 정말 설반이랑 남색질을 하였니?" 진종이 목소리를 낮추어
향련에게 물었다.

"돈이랑 선물을 많이 주니까 설반에게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어.
엉덩이 한번 대주면 열 냥은 준다고 하니 누가 대주지 않겠어?"

"옥애도 그렇게 당했단 말이지?"

"그럼. 그 애는 하도 많이 당해서 항문이 찢어질 정도였지"

"설반은 그렇다치더라도 엉덩이를 대어주는 쪽에서는 기분이 어때?"

"처음에는 아파 죽겠더니만 조금 지나니 약간 기분이 이상해지기도 해.
왜? 너도 관심이 있어?"

"아니, 그게 아니고, 동창들이 설반과 너희 관계에 대해 떠들어대서
말이야" 진종이 당황해 하며 시치미를 떼었다.

"이제는 설반하고도 상관이 없어" 향련의 얼굴에 잠시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설반은 늘 상대를 바꾸기를 좋아하거든. 처음에는 김영이었는데 그
다음 옥애와 나였단 말이야. 그런데 요즈음 새로 상대가 생긴 모양이야.
여기 학숙에서 맡고 다른 데서 구했는지 학숙에도 며칠째 오지 않고
있잖아"

(한국경제신문 1995년 7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