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도록 살이 에이는 듯한 추위 속에서 가서는 하마터면 얼어 죽을뻔
하였다.

그러면서도 가서는 희봉이 무슨 급한 일이 생겨 오지 못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새벽녘이 되어 눈발도 그치고 하늘이 희붐하게 밝아올 무렵, 가서가
오들오들 떨면서 까라지려는 의식을 추스르느라 애를 쓰고 있는데
동문이 삐그덕 하고 열리는 소리가 났다.

가서는 정신이 흐릿해져 아직도 밤중인 줄 알고 마침내 희봉이 동문을
따고 자기를 만나러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문으로 들어선 사람은 미루나무처럼 쪽 뻗은 몸매의 희봉이
아니라 허리가 꾸부정한 할멈 시녀였다.

그 순간, 가서는 몸이 얼어붙긴 하였지만 몸을 날리다시피 하여
담벼락에 바짝 붙었다.

할멈은 시력이 약한지 가서를 보지도 못하고 서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라고 소리를 쳤다.

바깥에서 서문을 따는 기척이 나고 하는 사이에 가서는 동문으로
해서 줄행랑을 쳤다.

집으로 돌아온 가서는 할아버지 가대유에게 불려갔다.

"네 이놈, 감히 외박을 하고 오다니. 어디서 자고 왔느냐?"

엄격하기로 소문난 가대유로서는 가서가 허락도 없이 외박을 하고
온 짓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가서가 이러저러해서 하룻밤 바깥에서 잘 수밖에 없었다고 거짓
변명을 하여도 가대유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놈을 매우 쳐라. 곤장 삼십대, 아니 사십대를 안겨주어라"

가대유가 집사에게 명령하자, 집사는 송구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다가
할 수 없이 곤장을 들어 가서의 엉덩이를 내리쳤다.

곤장 벌이 끝나자 이번에는 가대유가 가서로 하여금 뜰에 하루종일
꿇어 앉아 열흘분의 글을 읽도록 하였다.

물론 밥을 얻어먹을 생각은 아예 할 수 조차 없었다.

밤새도록 추위에 얼어붙은 데다 곤장 사십대로 물러 터진 엉덩이로
차가운 뜰에 꿇어 앉아 하루종일 굶으면서 열흘분의 글을 읽으려니
그 고초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가서는 하도 고통스러워 눈물이 나기까지 하였으나, 넘기는 책장마다
희봉의 아리따운 얼굴이 어른거리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저녁 무렵,벌이 풀리긴 하였지만 가서는 고뿔에 걸려 온 몸에 열이
펄펄 끓었다.

그렇게 며칠을 앓고 난 가서는 몸이 회복되기가 무섭게 할아버지
가대유 몰래 또 영국부로 건너가 희봉을 만나보았다.

앓고 있는 그 며칠 동안에도 얼마나 희봉을 사모했던가.

가서는 희봉을 보자 왈칵 눈물이 나려고 하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