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심신이 무겁고 특히 눈에 피로가 쌓일때면 야간산행을 나선다.

어둠컴컴한 산길을 불빛없이 걷다 보면 정신집중이 잘되고 동공운동이
활발해져 눈의 피로가 가신다.

한밤중의 산길을 보통 어두울 것으로 상상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서울 근처의 산은 시가지의 불빛 때문에 꽤나 밝다.

특히 구름이 많은 밤에 더 맑에 반사되고, 맑을 때문 별빛이나 달빛이
있어 등불없이 걷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

최근에는 대개 수요일이나 목요일 밤에 서울 근교의 산을 오르내렸다.

관악산은 둘이 많아 내려올 때 조심해야 하지만 화려한 맛이 있고, 청계산
은 다소 지루하지만 흙산이라 부담없이 산행을 즐길수 있다.

나의 야간산행 습관은 4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메산꼴에서 태어나 10km나 떨어진 국민학교를 다녔는데, 매일 굴티재라
불리는 큰 고개를 넘어다녀야 했다.

5,6학년때 담임선생님은 참으로 열정을 다 쏟아 밤늦게까지 우리를
가르치셨다.

두해동안 매일 밤 고개를 넘어 다니던 학우일행은 여서명이었는데, 산길이
좁아 한 줄로 길게 서서 고개를 넘을수 밖에 없었다.

산이 험준해서 살쾡이와 담비가 자주 나타났으며, 담력이 약한 친구는
살쾡이를 호랑이로 착각하여 혼비백산하곤 하였다.

심지어 미리 정해둔 순번에 따라 줄의 맨 끝에 서서 고개를 넘어야 하는
날엔 아예 학교를 나오지 않은 친구도 있었다.

이렇듯 당시에는 멀게만 느껴졌던 통학길의 추억이 복잡한 도시생활 속에서
한가닥의 여유를 찾을수 있는 야간산행으이 계기가 된 듯하다.

몇년전 10월 초순 동대문 시장에서 한 산악회와 함께 설악산행버스를 탄
적이 있었다.

오랫만에 야간산행의 멋을 만끽할 것으로 잔뜩 기대하면서 오색 약수터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처음부터 빗나갔다.

새벽 2시인데도 오색에서 대청봉을 오르는 불빛 행럴이 산중턱까지
이어졌고, 등산로 입구에는 등산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이래서는 야간산행의 묘미를 맛볼수 없다.

야간산행은 자연의 리듬을 깨지 않고 자연의 일부가 되어 그 속에 동화되는
즐거움이 있는데 한밤에 등불을 비춰대는 것은 잔잔한 호숫가에 돌멩이를
던져 파문을 일으키는 것과 같지 않은가.

의젖하게 자리잡은 산의 침묵앞에 겸허한 마음을 갖고, 대자연의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밤의 정적을 감상하자 나는 아직도 안경을 쓰지 않고
신문을 읽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등불없이 야간산행을 한 덕분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