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한국경제신문의 "동호동락"칼럼을 애독한다.

죽마고우들의 모임이나 각종 만남을 통해 삶의 활력소를 찾는다는
구절을 읽다보면 나 자신이 마치 그 모임에 함께있는 주인공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 호감이 간다.

그래서 매일 아침 신문을 받으면 경제뉴스보다 이 칼럼을 먼저 읽는다.

그러나 가끔 씁씁한 뒷맛을 느낄때도 없지 않다.

그것은 바로 모임의 인적 구성원에 대한 자랑(?)이 너무 지나치지
않나 하는 점 때문이다.

무슨 회사대표 회장 원장 사장 전무등등. 심지어는 대통령후부까지
들먹인다.

평사원이나 근로자등 말단 직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야기는
거의 없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자화자찬은 "동호동락"칼럼의 참뜻을
모르는 바라고 여겨져 내가 몸담고 있는 모습을 소개하고 한다.

꼭 50년전인 1945년 서울 안산국민학교 제6회 졸업을 함께한 남녀
26명의 동창모임으로 명칭은 "안산육우회"이다.

우리는 1934년생 개띠 서울토박이들로서 현재 한달에 한번씩 매월
셋째주 토요일에 만나고 있다.

돌이켜보면 독립문을 거점으로 영천 현저동 홍제동을 보금자리로
함께 자랐던 우리들이 당시 개성으로 졸업여행을 가서 선죽교를
함께 걸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또 해방이 되던날 서울광장으로 달려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쳐부르던 기억이 올해 광복50주년을 맞으면서 감회가 더욱 세롭다.

회우들을 오랫만에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묻고 추억을 되새길때면
마음이 어쩌면 그리 정겹고 흐믓한지 모른다.

이렇듯 국민학교동창들이 모여 함께 술잔을 나누면서 담소하는 즐거움
이야말로 인생의 긴 장정에서 진정한 "동호동락"이 아닌가 싶다.

지금은 모두 나이 육십을 넘긴 회우들이지만 일부는 아직도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필자는 30여년간 미8군 인력감사관으로 일하다 5개월전에 퇴직했다.

김성구회우는 참치잡이배의 기관장으로 몇달씩 해외에 나가 일한다.

또 여성인 송현호,공상희회우는 여행사 촉탁으로 있다.

"안산육우회"총무인 유순자회우의 알뜰한 뒷바라지도 빼놓을수 없다.

우리는 일제말기에 태어나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를 겪으면서 오직
살아남는 것외에 어느 것도 생각할수 없는 아픔속에서 4.19 5.16등을
거치는 숨막히는 생활을 해왔다.

이런 격동기에 살아남았기에 서로를 더욱 이해하고 고통과 기쁨,사랑을
함께 나눌수 있는지 모른다.

이런 점에서 배고팠던 시절에 만난 우리 "안산육우회"회우들의 우정은
영원토록 변치 않을 것이다.

삼의 공허감을 채워줄수 있는 만남이 있기에 지금도 "안산육우회"가
모이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끝으로 모임의 소원이 있다면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 개성이 선죽교를
함께 가보는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