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숙이 나졸들과 함께 본부로 황망히 가고 난후, 집에 남은 식구들은
무슨 변고가 있는게 아닌가 하고 안절부절 못하며 봉숙을 기다렸다.

밤이 깊어서야 봉숙이 돌아왔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봉숙은 싱글벙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저 사람이 본부로 끌려가 하도 혼이 나서 실성을 했나.

봉숙의 아내는 봉숙의 행동거지를 유심히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로 부릅디까?"

"아, 글쎄, 난 또 무슨 날벼락이 떨어지나 하고 조마조마 했는데 말이야,
이거 참 사람 운이 펴려고 하니 기이한 일도 다 있구려"

"기이한 일이라니요?"

봉숙의 아내뿐만 아니라 봉씨와 교행들도 긴장하며 봉숙의 대답을
기다렸다.

봉숙은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알고 보니, 글쎄, 신임 부사께서 우리 사위랑 아주 친한 사이였다는
거야.

고소 땅 창문성에서 살때 우리 사위가 부사님에게 장안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가라고 여비까지 마련해 주었다더군.

그 덕분에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관리가 되어 이곳 저곳
부임지를 옮겨 다니다 우리 지방까지 오게 되었는데, 오늘 부임행차
도중에 우리 사위집에 있던 교행이를 보았다는 거야.

그래서 진선생이 이 지방으로 이사를 온 모양이라 생각하고 사람을
보내 모셔오려 했다는 거야.

내가 사위가 집을 나간 자초지종을 다 말씀드렸더니 무척 안타까워
하시며 한숨까지 쉬시더라구.

그러면서 외손녀 영련이 소식도 묻는데, 이거 원, 몸둘 바를
모르겠더군.

영련이 이야기를 들으시더니만 고맙게도 나졸들을 풀어서라도 그 애를
꼭 찾아주겠다고 하시는 거야. 그리고는 이렇게 돈 두냥까지 주시면서
돌려보내더라구"

"그럼 신임 부사님의 성함이 가우촌이시군요"

진사은의 아내 봉씨가 반가운 마음에 목소리를 높였지만, 새삼 남편과
딸 아이를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져 견딜수 없었다.

다음날, 신임 부사 가우촌은 사람편에 은 스무냥과 비단 네필을 봉씨
에게 보내고, 봉숙에게는 봉씨의 몸종 교행을 소실로 맞이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었다.

봉숙이 이런 천우의 기회를 놓칠리 없었다.

그날밤으로 교행을 가마에 태워 부사가 거처하는 관소로 데려갔다.

가우촌은 크게 기뻐하며 즉석에서 사례금으로 봉숙에게 돈 백냥을
주었다.

가우촌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방으로 들어오는 교행을 바라보니
만감이 교차하여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가우촌의 눈앞에는 고소 땅 창문성 진사은 선생댁의 꽃밭이 어른거렸다.

그리고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호로묘를 나서던 그 새벽의 안개가 피어
올랐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