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년간 그러했듯이 지난해에도 러시아의 산업생산은 무려 30%가량
이나 감소했다.

서민들에 대한 물리적 생존의 위협이 커지는 속에서 이들은 또다시
저주받은 삶을 꾸려가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눈보라치는 아르바트거리에 앉아 낡은 가재도구를 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노파의 모습이나 모스크바의 쓰레기처리장을 뒤지는 서민들의
모습은 이제 더이상 생소한 것이 아니다.

지하철역이나 하수도에 겨울둥지를 틀고있는 수많은 군상들,그들은
수명을 다한 공산주의사회의 쓰레기만큼이나 값어치가 없는 것인가.

빈곤의 그림자가 러시아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가운데 소수의 상류계층은
파리나 뉴욕 프랑크푸르트와 같은 자본주의의 성지를 연상케하는
풍요를 구가하고 있다.

카로,돌스,스타니라프스키같은 일부 호화판식당은 입장료만 100달러,교사의
한달봉급이다.

신설된 페트로프스키 백화점에는 서구 메트로폴을 장식하고 있는
최고의 상품들이 고객을 기다리고 있다.

이곳 출입이 가능한 소수의 "선택된 자"들에게 있어서 상품의 값은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값을 흥정하거나 영수증교부를 요구하는 경우도 드물다.

2만9,700달러에 달하는 브라이틀링시계를 여러 고가의 인기상품중
하나에 불과하다.

70여년에 걸쳐 사회주의의 이상으로 간주되어온 평등사회의 구조가
이와같이 단기간에 와해되어 버린 역사적 전례를 발견하기 어렵다.

볼셰비즘의 구세주 레닌묘지를 지키는 근위병이 사라진게 바로 엊그제가
아닌가.

소수의 있는자와 다수의 없는자간의 격차가 오늘의 러시아처럼 첨예하게
나타나 있는 근대사회를 발견하기 어렵다.

사회주의를 마무리하면서 러시아가 맨먼저 유입받은 자본주의정신,그것은
불행스럽게도 맨체스터 자본주의로 표징되는 약육강식의 천민정신이다.

문제는 이들 경제적 엘리트집단이 슘페터적 혁신활동에 대한 시장보상의
결과 생성된 것이 아니고 다분히 기식성 착취와 마피아적 범죄집단들과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스크바의 상점을 잠식하는 상품들은 우유나 신발에서 부터 중고자동차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이 수입상품들이다.

원자재를 팔아 소비재를 수입하는 파행성이 지속되는 경우 국내산업의
공동화현상은 피할수 없을 것이다.

이와관련,사회적 윤리의 부재현상은 오늘날 러시아가 당면한 최대의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마피아의 보호막이 없이 모스크바에서 영업활동을 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다 같다.

이는 규모가 큰 사업이나 외국인기업체의 직접투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볼쇼이 극장앞에서 뜨게질한 양말을 팔고 있는 노파,"나이트 플라이트"를
가득메운 20대의 몸파는 여인들이라고 해서 마피아의 촉수로부터
벗어날수는 없다.

한 추정자료에 따르면 러시아 사회총생산의 40%가량이 이들 지하조직의
통제를 받고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일 신문방송을 통하여 이러한 범죄가 고발되고 있지만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로 그치고 만다.

부패에 기식하는 국가의 신계급(Nomenklatura)과 마피아의 신계급이 야합
하여 있기 때문이다.

공식 통계에 의하면 지난해 범죄의 희생이 된 사망자 수는 무려
3만2,000명을 육박하고 있다.

페레스토로이카나 민주주의,이것은 다수의 러시아 사람들에게 있어서
범죄와 무정부주의를 뜻하는 동의어로 간주되고 있다.

아담 스미스이후 여러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에게 있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순조로운 작동조건은 다음과 같은 세개의 질서유형을
구비하는데 있었다.

사회의 윤리질서,공정한 법질서 그리고 시장의 경쟁질서가 그것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사회경제적 기본체제모형으로 수용하려면 그러한
세가지의 질서중 어느 하나가 결여되어 있어도 소기의 성과를 기대할수
없다.

문제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나 시장의 가격기구와 같은 제도적
골격은 "수입"에 의존할수 있다 해도 사회의 윤리질서는 그에 상응하는
문화적 역사적 토양없이 그 건전한 육성이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체제전환 과정에서 오늘날 러시아가 겪고 있는 최대의 고민 역시
바로 그러한 윤리질서의 부재를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에 있음이
분명하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