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중식 < 편집부국장 >

우리나라와 중국을 잇는 정기직항로가 개설됨으로써 한중 양국관계는
한발짝 더 바짝 다가서게 됐다.

지난 23일 밤 북경 인민대회당에 울려퍼진 아리랑을 들으면서 이같은
사실을 재확인할수 있었다.

대한항공과 중국의 국제항공이 공동주최한 이날의 인민대회당 대연회장
축하연에서는 우리 가무단의 민속놀이가 공연돼 참석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경제개방을 부르짖고 있지만 아직까지 사회주의 체제를 철저하게
고수하고있는 중국.외국의 민간기업이 국가권위의 상징으로 통하는
인민대회당을 빌려 축하연을 벌인 것만 해도 이례적인 일인데 민속공연까지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못했었다.

우리측에서 500여명,중국측에서 8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축하파티
에서 참석자들은 서울에서 준비해간 불고기 떡등 우리음식으로 접대를
받았다.

이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으나 중국을 이해하고나면
수긍이 가는 일이다.

중국사람들만큼 자존심이 강한 민족도 아마 없을 것이다.

음식문화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중국 사람들은 날아다니는 물체중 비행기를 제외한 모든것으로
요리할수 있다.

땅위의 네발달린 물건중에서는 책상과,물에 있는 물건가운데서는
배만 빼고는 만들어 먹지 못하는 것이없다" 파티가 끝난후 "이런
일은 전무후무하다"며 중국인 특유의 수다를 늘어놓는 한 관리인의
말속에는 이날만은 모든 것이 예외였다는 의미가 함축돼 있음을
느낄수 있었다.

런민타후에이탕(인민대회당).천안문광장 서쪽에 있는 중국최대의
현대식 건물.우리의 국회의사당에 해당하는 이곳은 전국인민대표회의와
공산당이나 정부에서 개최하는 대집회가 열리는 곳이다.

중국을 방문하는 각국 원수들에게 환영연회를 베푸는 곳이기도 하다.

최근들어 중국이 자본주의의 단맛을 맛본후 돈벌이에 신경을 쓰면서
외국의 민간기업들에 소연회장을 대여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인민대회당의 얼굴에 해당하는 대연회장을 우리 민간기업에
내주고 민속공연과 우리음식까지 제공토록 한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 아닐수 없다.

더욱이 인민대회당 입구에서 2층 대연회장으로 이어지는 통로양편에는
직항로 개설을 축하하는 양국 관계인사들의 화환 300여개가 늘어서
이날의 축하분위기를 한껏 더해줬다.

중국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중에 요미엔즈(유면자)라는 말이있다.

서로 상대방의 체면을 세워준다는 뜻이다.

지난 72년 미.중수교시 닉슨대통령과 모택동주석이 마오타이주로
건배한 바로 그 장소였던 인민대회당 주연회장에서 열린 축하파티에서
양측은 요미엔즈를 주고받으며 우의에 가득찬 축배를 마음껏 들었다.

미.중국교가 핑퐁외교에서 비롯됐다면 한중수교는 항공외교로부터
시작됐다고 할수있다.

1983년 5월 5일 일요일인 이날은 여느때나 다름없는 조용한 휴일이었다.

중국 심양을 출발하여 상해로 향하던 중국민항총국소속 트라이던트
여객기가 공중납치돼 우리영공으로 날아든 것이었다.

지금은 고인이지만 당시 장관급이었던 중국민항총국의 심도총국장이
특별기 편으로 서울에 날아오는등 양국정부간에 승객송환을 위한
교섭이 시작됐다.

요즘에는 별로 대수로운 일로 여겨지지 않겠으나 적대관계에 있던
당시로서는 여간 쇼킹한 사건이 아니었다.

인도적인 정신에 바탕을 두고 추진된 양국정부간 송환교섭은 급속도로
진전돼 탑승자들과 기체는 납치범들과 함께 곧 중국으로 송환될수 있었다.

이것을 계기로 양국을 가로막아온 장벽은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심도총국장은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우리정부와 대한항공에
호감을 가지게 됐고 매사에 호의를 보여왔다.

이제 양국 하늘에는 다섯개의 직항로가 개설돼 태극마크와 오성기를
단 국적기들이 이길을 따라 주 102회를 운항하고 있다.

조중훈 대한항공회장의 영문이름의 이니셜을 따 C H GHO라는 닉네임(아직
정식 항로 명칭이 정해지지 않았음)으로 불리는 서울~북경 항로는
양국의 거리를 1시간30분으로 단축시켜놨다.

급속도로 진전되고있는 양국관계를 미뤄 볼때 고비사막을 경유,유럽으로
이어지는 최단거리의 세계일주 항로 개설도 멀지않은 것같다.

한중관계의 개선으로 세계항공노선의 지각변동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서울이 세계항로의 중심이 되는 그날이 하루속히 오기를 기대해
본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