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영진 <본사 상임고문>

보내는 해는 다사다난했다고 믿고,맞이할 해에는 깊은 뜻을 부여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번에는 더 그렇다.

이땅에서 산 사람치고 곧 역사속에 사라질 94년 한해를 조용했던 해라고
무심히 넘기기 어려울 것이다.

사건사고로 찌든 끔찍한 한해였다.

다가올 95년의 의미 또한 여간 깊지 않다. 서역을 쓰고 사는 지구인에게
공통이다.

나라로는 해방된지 50년을 맞는 해요,세계로는 20세기를 두동강으로
가른 2차대전 종전 반세기를 맞는 해이다.

이 50년사이 인류가 겪은 변화는 아마 그 이전 5백년간의 변화보다 크면
컸지 작지 않을 것이다.

5대양 6대주와 반도 구석구석,인류와 이 겨레의 모습들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뒤로 가는 세월이 성에 안차 아쉬워들 하지만 인류사는 누가 뭐래도
퇴보보다는 전진을 해왔다.

아사는 끊이지 않아도 인간생활의 향상은 엄청난 속도로 진전되어
왔다.

정신생활도 억압에서 합리를 향해 큰 걸음을 내디뎠다.

흑인 대통령 만델라의 남아공 통치를 어느 누가 꿈엔들 상상했겠는가.

가령 1895년으로 1백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의 실감은 더하다.

동양전역이 서세에 무릎꿇은 틈바귀에서 유일하게 열강대열에 끼인
일본이 청을 내쳐 이땅을 반쯤 삼킨 것이 그 해였고,러시아마저 내몰아
반도를 독식하고 대륙교두보 확보의 숙원을 푼것은 그 10년뒤 일이다.

시바 료타로는 그때의 도취때문에 일본이 겸손을 잃어 패전을 자초했다고
회고한다.

다행히 반도남쪽은 20세기 후반을 선용,19세기의 허송을 얼마만큼
만회했다.

그러면 이제 전개될 한국의 미래는 어떤 것일까.

힘을 더 솟구쳐 백년뒤에 가서 21세기를 흑자결산할 것인가,아니면
격세유전처럼 19세기말의 암울을 되풀이할 것인가.

그 대답은 오로지 한국인 자신들의 마음 먹기에 달렸다. 겨룸에서 상대와
나를 동시에 알지 못하면 백번 진다. 어느 한쪽만 알아도 그렇다.

구세기까지 한국인은 나는 과장해 알고 적수인 일본은 알면서도
얕보았다.

임란과 왜구로 오래 쌓였던 한과 굴욕이 증오로,증오가 다시 멸시로
전위된 탓이다.

그 결과 저들이 수세기 쌓아올린 개명의 준비를 대수롭지 않게
보았다.

10세기에 이미 가나글자를 만들어 국민을 가르치며 산업화 도시화 바탕
위에 이룩한 개국과 부국강병을 운좋았다고 비하하는 과오를 범했다.

한말 비운은 자초된 것이었다.

그러나 더큰 문제는 그 고질이 낫지않고 오늘까지 앓고 있는데 있다.
그 근원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줄이면 맹목적 사대다.

섬기는 것은 오로지 유교를 만든 한족뿐,몽골 왜 여진은 설사 힘이
강성해져도 오랑캐라 깔보다가 하나같이 그들한테 능욕을 당했다.

전후 반세기 대미관계는 그렇다 치더라도 일본에 대해서는 아예
막무가내다.

중국을 더 가까이 하면 했지,비싼 돈들여 총독부 건물을 헐어서라도
반일을 안하고는 말발이 안선다.

그 책임은 일측에 먼저 간다. 반성에 인색한 협량은 독일과 너무
대조적이다. 그러나 책임의 선후를 막론하고 손해는 양쪽이 다 본다.

냉전후 동아시아의 세력재편이 진행되는 이때 소중한 것은 현실감각이다.

명분은 특히 국제간에선 장식물이다.

소중화,동방예의지국,외면치레,관존민비에 하염없이 연연하다간 역사를
그르칠 뿐이다.

바야흐로 미.중.일 동남아간의 수면하 각축은 숨가쁘다.

미국은 APEC-NAFTA등 일층 자국중심 결속을 강화하고 있고 일본은 대미
유대지속과 아시아 맹주역중의 택일을 놓고 목하 고민중이다.

중국도 미.일을 견제하여 동아 리더역을,마하티르 총리는 아세안 결속
아래 독자 영향력신장을 노리며 일본에 눈길을 보내고 있다.

동아에서 한반도가 대국은 아니다. 착각해선 안된다. 그러나 대립이
팽팽할수록 균형인자의 역할은 중요하다. 거기에 한국이 최적격이다.

지정-지경학적 위치가 그렇다. 통일이 되면 더 좋고,그 이전이라도 지속
성장만 하면 국력 또한 만만치않다.

여러기관 미래예측상 동아시아에서 한국의 중.일.인니 다음자리 차지는
최소 확실시 된다.

이런 속에서 필요조건은 나라를 이끄는 인물의 역량이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는 카리스마가 지도력의 필수조건이었다.

정당성을 세우기 위해 보통인간으로는 할수없는 공속 희생 초능력을
과시해야 했다.

그자리에 왕왕 구국이란 미명하의 쿠데타가 파고들곤 했다.

자칭 애국자 출현의 악순환을 더이상 허용하지 않는 것이 시대정신이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사회의 인재배양 역량이다.

인재가 하늘에서 떨어져 주길 기다릴게 아니라 일꾼이 생장하도록
사회토질을 개량해야 한다.

기대속에 지난 주말 단행된 정부개편과 인사의 총평은 "무난"이다.

하지만 조직개편 못지않게 조직을 목표를 향해 끌고가는 사람의 역량이
중요하다.

그 가운데도 알맹이는 파도높은 해도위에 나라의 항로를 그려내는
항해사의 역할이다.

아마도 김대통령이 시드니에서 세계화를 선언하며 내비친 "세계 경영"의
함의가 그 역할을 지칭했으리라는 어림이 간다.

새 내각도 전능은 아니다.

관료사회 국회 여야 언론 사회전체가 "어디 되는가 봐라"하고 삐딱해선
또 실패다.

무엇보다 "이젠 되겠다"는 민의의 메아리를 이끌어 내는 것이 대통령,
새내각의 최대 임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2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