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문제에 대한 정부와 업계의 시각차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최근 국내기업의 허리라고 하는 중기업과 전문기업들이
설 땅을 잃어가고 있는 현상은 그냥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중소기업의 도산이 늘고 있다고 하지만 창업이 더 활발해 문제될 것이
없다"는 식의 정부당국자와 고위층의 시각은 중기업의 위기는 물론 창업
붐의 그늘에 가려있는 중소 제조업의 공동화현상을 간과한 안이한 상황
인식이다.

중소 제조업에 관한 최근의 통계를 주의깊게 살펴보면 분명 위기적
요소들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겉으로 나타난 숫자만 보면 중소 제조업체수는 매년 증가해온
것으로 돼 있으나 구조적으로는 88년을 분기점으로 중규모 기업들은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93년만 보더라도 종업원 100~299명의 중기업은 4.5%가 감소했다.

그러나 종업원 20명미만의 소기업이 6.5%나 증가해 전체 중소제조업체
수가 3.5% 증가한 것으로 돼있다.

이같은 통계가 주는 의미는 자명하다.

구멍가게 수준의 영세소기업만 늘어나고 전문기업이나 대기업으로의
성장잠재력이 있는 중기업들은 오히려 경제무대에서 사라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 창업되는기업마저 제조업비중은 줄어들고 소비성 서비스분야로
집중되고 있다.

문제는 중기업 뿐만이 아니다.

엊그제 우리는 국내의 대표적 전문기업이 하루아침에 몰락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창업 4반세기의 오디오 전문업체 인켈이 국내외에서의 그 높은 성가에도
불구하고 자금력을 앞세운 대기업그룹 계열사들과의 출혈경쟁이 못이겨
해태전자라는 이름뿐인 오디오업체에 넘어간 것이다.

이는 우리의 기업풍토에서 백화점식 경영이 아닌 외길을 고집하는
전문기업의 생존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증명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중기업과 전문기업이 설 땅은 앞으로 국내에도 M&A(기업 인수합병)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면 더욱 좁아질수 밖에 없다.

중기업과 전문기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은 오늘날 반경쟁적 사고로
매도되기 쉽다.

그러나 국내 중소기업의 절반이상이 대기업과의 종속적인 하도급구조
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에서 공정한 경쟁의 틀을 마련해주지도 않은채
무조건 경쟁으로 내모는 것은 룰 없는 게임을 하라는 얘기나 다름없다.

안이한 시각에서는 안이한 정책밖에 나올게 없다.

대기업의 호황에 들떠 관심밖으로 밀려난 중기업과 전문기업의 위기를
똑바로 인식하려는 자세없이는 올바른 대책도 찾아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2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