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은 착잡한 하루였다.

예고된 남산 외인아파트의 시원한 폭파는 카타르시스 역할을 얼만큼 했지만
오전에 터진 서울 종암동의 육교붕괴 사고로 효험이 반감되고 말았다.

육교붕괴는 인명피해만 적었을뿐 성격상 성수대교 붕괴와 하등 다를것
없는 졸속 건설과 무책임 관리가 빚어낸 한국형 사고의 또하나의 전형이다.

오늘 우리는 그런 동류 사고들의 연발성이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거기에만
매달릴수 없는 중압감에 시달린다.

이것이 급한가 하면 저일이 더 중요해,여러 큰 일들에 짓눌린 나라의
오늘이 답답해진다.

한심한 것은 모두가 시국의 심각성엔 동의하면서도 누구하나 내 탓이라고
나서는 사람없이 남만 탓하는 인심의 회오리다.

더욱 큰 문제는 그런 책임회피 현상이 서민에서 보다도 의자 높고 책임
무거운 자리의 사람들 사이에서 더 보편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서도 정치권의 작태가 가장 큰 일이다.

여.야를 가릴것 없다.

돌이켜 보자.

만일 작년 하반기 이래 경제가 이만큼 되어가니까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나라안에서 제대로 굴러가는 곳이 과연 한곳이라도
있었을까.

지존파 살인극에 나라가 들끓더니, 그 충격이 한달도 안돼 터진 성수대교
붕괴로 묻혀갔다.

경천동지하던 성수대교 사고마저 진상규명 조차 지지부진한 단계에서
유야무야될 판이다.

엉뚱하게 12.12 기소유예로 정치권이 충돌, 숫제 개문휴업이 된 국회는
태산같은 현안들을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이 판국에서 우리는 누구를 나무라고 누구에게 책임을 추궁해야 하는가.

어느 한두 군데가 잘못 됐어야 책임을 따지지, 너무 환부가 넓고 깊어
처방은 커녕 병인가리기 조차 어렵고, 잘 잘못을 가리는 것은 무의미하기
까지한 지경이 됐다.

한마디로 총체적 근시, 총체적 조급증, 총제적 부패요, 총체적 무책임이다.

전신마비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그렇다고 우리는 손을 들수는 없다. 그럴수록 차분하게 원인을 캐야
한다.

누구를 벌주고 매도하려는 목적에서 보다 개선방법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원인을 아는 일이 불가결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잘못을 포함하여 양심적으로 반성해야 한다.

지금와서 어느 일부에게 몽땅 잘못을 씌운다고 해결되기에는 너무 중증이
됐다.

가장 공통적이고 근본적인 병인은 무엇인가.

짧게 줄이면 조급증과 비뚤어진 명분론적 가치관이다.

과거 개발연대에서 모든 것을 빨리 하자고 서둘렀다.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못했을 일도 많았을 터이지만 정부나 국민이나
일을 너무 서둘렀다는 점에는 누구나 시인하고 부끄러워 할 것이다.

그런 조급증의 바탕에는 무엇이 깔려 있는가, 양심껏 살펴 보자.

내가, 우리가 해낸다는 소아적 명예욕이고 체통과 명분의 과잉 존중이다.

물론 그 속엔 물질적 이기심, 배금사상, 물신주의 작용의 여지도 커,
그것이 총체적 부패의 근본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위가 높을수록, 고위 지도자를 자처할수록 "다른 누구아닌 내가
해내야 한다"는 지나친 명예욕이 종국에는 불행의 화근이 된다.

국가적 위상에서도 과욕은 있을수 있다.

일종의 선진국 조급증이 퍽 널리 만연되어 있음을 냉정히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현단계에서 우리에게 더욱 급한 것은 내실이 동반되는 성장이다.

키만 웃자란다고 성장은 아니다.

교량을 하나라도 차분히 세우기 보다 빨리 둘을 놓는 쪽이 외형으로
좋고 국민총생산(GNP)도 더 늘어난다.

등위가 올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빨리 들어갈지 모른다.

그러나 서둘러 세운 교량과 육교가 자꾸 무너지면 그런 선진국은 있을수도
없고, 부러움도 아니다.

새삼스레 제창된 세계화구상의 내용을 정부가 채우는 일도 다급하고
중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대외지향을 하고 내일을 바라볼수록 내실을 채워야
한다.

또 내실을 채우는데 제일먼저 할 일은 모든 사람이 제자리에 돌아와
본래의 역할부터 시작하는 일이다.

누구보다 이 다사다난한 시국에 나라의 가장 큰 짐을 나눠진 300명 다되는
국회의원들이 언제까지 일안하고 패쌈만 할건가 답답하다.

내건 명분이 기분 좋지 않은 12.12라 여론도 찬반표현에 신중하겠지만
중대사일수록 원내에서 당당한 정론을 펴 영향력을 키워야지 그 하나에
이분법으로 매달려 무슨 정치인가.

국회가 다룰 나라의 중대사는 결국 본인들의 자숙에나 기대할 12.12사건
말고도 지천으로 많다.

법정시한 열흘 남긴 내년 예산안을 이젠 단시간에 후딱 처리할수 밖에
없게 됐으니 그같은 연례행사가 교량 날림공사의 국회 재판이 아니고
무언가.

어디 예산뿐인가.

내년의 지방선거를 앞둔 관련법, 시장개방에 대비한 농업관계법, 각종
세법개정에다 WTO동의안, 대북 경수로처리 심의, 각종 연금운영문제
등등 국회가 모른체 해선 안될 급하고 귀중한 안건이 태산같다.

나라 일이 대통령 혼자 떠맡을 만큼 쉬운 세상은 아니다.

모두가 합심해도 어려운, 그래서 다른 나라들 정계도 죽을 쑤는 무한
경쟁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