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어느 정책세미나에서 자본주의연습론이 제기되었다.

물론 정확히 그런 말로 포현되지는 않았지만 제대로 된 자본주의를
해본적이 없다든가 잿더미위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경제가 곧 인간의 운명이 되는 시대 또는 생산물의 교환에 불과한 상업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에 있어 자본주의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숙명적으로 현대인의 생활력의 원천을 이루고 있다.

또한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계급투쟁에 의하여 붕괴될 것이라고 격앙했던
마르크스나 합리성과 불합리성간의 치열한 투쟁을 통하여 그것이 영속
되리라고 장담했던 막스 베버나 역사적인 근접촬영을 위하여 평생을
바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과학적 사회주의는 패배했고 망한 것은 현실사회주의에 불과하다는
미련만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터에 이제와서 우리나라의 현실
자본주의가 패배했다는 얘기는 무슨 얘기인가.

자본주의라는 말은 마르크스가 먼저 꺼냈다지만 베버가 처음 지적한 천민
자본주의는 나이어린 소년에게 위험한 굴뚝청소를 시키고 혼절한 광부에게
그 시간 만큼의 품삯을 제끼는 비정한 시절을 겪고도 활짝 꽃이 피는
마당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왔길래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하기야 이나라의 기업인들은 한동안 본원축적에만 눈이 어두웠다.

아니 그럴사한 사연도 있었다.

박통과 곤통을 함께 가지고 있는 이나라 특권층의 재산형성을 뒷바침해주는
일은 모리간상의 몫이 될수 밖에 없었다.

일제때 기업인으로 제일 성공한 박아무개씨가 끝내 해방조국에서 몰락한
사연도 결코 가볍게 볼수는 없을 것이다.

성수대교도 어디가서 누구에게 얼마를 바치고 따내던 시절의 산물이다.

근본적으로 대소기업인이 공권력과 그 주변세력의 생활비와 부를 대주는
일은 우리사회에 만연한 무질서와 불공평의 온상이 되어 왔으며 개발독재
시대의 인플레를 타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자동적으로 증폭되는
기제속에 맡겨져 있었다.

특히 금융이라는 실탄이 영향력있는 기업에 편중공급됨으로써 인플레
기득을 과점시키고 그 힘으로 계속 실물을 확장하면서 중소기업을 궁박으로
몰아 넣는 시스템도 눈에 잘 띄지 않게 돌아가는 구석이다.

결과적으로 기업다웁게 커보려는 기업인은 좌절을 맞이해야 한다.

비대해진 기업이 자신들의 전용시장을 통하여 계속 쉽게 외형을 늘리는
동안 군소 메이커들은 도부상으로 전락하여 수금하기도 바쁜 판이다.

무엇때문에 큰기업이 세계적 발명품을 개발하며 어느 겨를에 또 무슨
돈으로 중소기업이 품질개선에 힘쓰겠는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나서야 본게임에 들어가자는 얘기가 그나마라도
나오고 있으니 무엇이 또 어찌되어야 이나라를 손에 쥔자들이 부뚜막의
소금을 집어 넣겠는가.

어떻게 보면 소금을 집어 넣을 사람들이 안집어 넣고 있는동안 넣어야
된다고 우기는 지식인은 또 다른 이조오백년을 변방에서 우짖는 새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 그 만도 못해서 시침떼기 조막손들과 허망주는 일에 동참하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지금까지의 자본주의가 연습게임이었다면 국민에게 실상을 알리고 본게임
준비를 시키는 일은 시급하다.

아울러 아직도 우쭐대는 실패의 장본인들이나 실패를 연습으로 쉽게
치부해 버리는 그 아류들도 철저한 참회와 따끔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그럴때에만 사회는 기강이 서게되고 다시 단합해서 뛸 힘이 생기게 된다고
믿는다.

또한 과거를 묻는 방법은 엄정해야 한다.

그것은 앞으로를 가르치기 때문에 신뢰회복의 지름길이 된다.

문민정부초기의 무원칙하고 즉흥적인, 또는 무슨 딴 의도가 있지 않았나
싶은 개혁을 국민들은 어떻게 보고 있는지 두려워 해야 한다.

이제 그만하자는 쪽으로 유도하면 국민은 "내 그럴줄 알았다"는 식으로
너그럽게 넘어간다.

지금은 흔히 듣는 얘기도 이나라에 정녕 법이 있는냐 하는 것이다.

무전유죄가 아니라 무법천지란 얘기다.

노출된 사건들이 통째로 자취를 감추고 절묘하게 마감되기도 한다.

이 나라에 제일 유능한 전문가들이 한편의 연극을 매끄럽게 연출한듯
개운하기 까지 하다.

또한 둘만 아는 부조리가 감쪽같이 성업중이라니 사회적 무법감은 두텁게
침전하지 않겠는가.

누가 소금을 집어넣게 할것인가.

공소하게 처방만 내리고 있는 그 많은 이나라 인텔리겐차들이 끝내 희망
으로 돼줄 것인가 그래도 기다려 본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