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영진 <본사 상임고문>

사람에 죽음이 없다면 도대체 인간은 얼마나 더 방자할까. 고대 유적중
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두가지 징표가 나타난다.

하나는 절대신앞에 무력한 인간의 겸손이고,하나는 반대로 순장까지
강요하는 지배자의 절대오만한 내세관이다.

어쨌건 세계사상 불가사의라고 하는 초대형 축조물들은 대부분 신전
아니면 무덤이다.

적도에 가까워 태양의 위력에 압도당했을 고대문명일수록 하늘을 찌를듯
높고 웅장한 석조물을 잘 세웠다.

석굴암의 아담하되 빼어남으로 위로를 삼는다해도 나무 돌 흙이 소재인
우리 문화재의 앙징한 스케일을 가령 나일 인도 마야 아즈텍 잉카등의
거석유적에 맞 비교함은 확실히 곤혹이다.

이땅에는 범신만 있지 절대신이 없었기 때문에 칠성당 성황당의 규모가
그정도면 족했을까. 아니면 땅이 옹색해서 간덩이가 작을수 밖엔
없었던가.

그 아쉬움때문에 그런지 문명의 값어치를 스케일아닌 인정으로 재고싶은
충동을 느낀다.

아뿔사 크면 큰만큼 백성의 고혈도 흠뻑 짜야하니 되도록 작고 검소하게
궁궐 짓고 능을 팠던 이나라 조상들의 마음 씀씀이에 오히려 감사하다고
소리치고 싶은 충동이다.

만리장성 쌓는데 수만명,실제로 거대한 고대 역사에 동원된 물자와
인명희생은 하도 엄청나서 작은 땅안에선 엄두도 못낼 호사다.

한데 요즘 연거푼 축조물붕괴를 지켜보면서 환상은 나래를 편다.

차라리 조상네가 희생을 각오하고라도 거대 토목건축의 경험을 닦아
물려주었던들 오늘날 다리하나 제대로 못놓고 간수해 멀쩡한 생명들이
낙화하는 참상은 줄일수 있었지 않나 아쉬워진다.

만세상 여러 고적들엔 초월적 불가사의가 너무 많다.

장서많은 도서관등 문화의 꽃이 만발했던 나일문명은 차치하고 문자가
없었다면 기하학도 변변지 못했을 페루의 잉카나 멕시코의 마야 아즈텍인
들은 어찌 그리 재주가 좋았을까.

3천m 고산에서 몇t짜리 거석들을 틈새에 칼끝조차 안들어가게 견고히
맞물려 쌓아올린 쿠스코의 축성술을 어느 현대인인들 설명할 것인가.

만일 각자더러 한국땅에서 가장 크고 견고한 축소물을 손꼽으라면
무엇들이 꼽힐까.

1960년대 이전까지로는 역시 고찬(고찰)과 왕릉이 고작이었다.

일제때 누가 설계했건 수풍등 몇개 댐,한강대교등 교량,흥남비료등
산업시설 몇군데가 꼽힐수는 있으리라. 그러나 역시 큰 인조물로는
60년대이후 축조된 것이 대부분이다.

춘천의 사력과 아산만등의 여러 댐,포철고노등의 큰 산업시설,63등의
대형빌딩들이 이 나라 사람 손으로 세워진 대표적 물건들이다.

그런데도 어쩐 일인가. 현대 축조물에는 불가사의의 들먹일 신비가
없다. 아마도 현대과학에 대한 과신 탓일 것이다.

그점에선 인마의 힘이 고작이었을 시절 진흥왕 순수비를 비봉위에 올려
세운 옛 신라인의 재간에 더 감탄이 간다.

하지만 바위를 떡주무르듯 해 빚어논 그 여러 곳의 해외유적들에선
감도가 더 다르다.

더구나 한강다리 몇개인줄 아느냐고 숫자 느는데 흥이 났지,그 큰
시설운용을 제도의 틀아닌 통나무다리식에 내맡기다가 기필 치르고만
10.21참사를 보고는 내 자신에서부터 정나미가 떨어진다.

우리네의 잘잘못은 과연 무엇인가.

동양제일이라고 왕창왕창 덩치 키우기,모양 좋은 하드웨어만 들여
놓는다고 선진국 다 되는줄 아는 착각,그래서 OECD가입을 어린애 처럼
이땅의 감투들이 보채온건 아니던가.

86,88,히로시마에서 금메달 연속 딸때 콧등 시큰했다. 거기에 맞춤인
배달의 기질이 있다. 바로 신바람이다.

박정희장군이 이끈 급성장도 "새벽 잠이 밝았네."하는 새마을노래 장단이
이 신바람에 불을 붙인 적시타의 주효라고 보아야 옳다.

그러나 이제부터 다르다. 신바람의 본질은 솟구쳐 비상하는 일시적
약동에 있다. 질력남을 참는 석장의 절차탁마는 신바람만으로 부족하다.

개발독재시대의 쾌속성장에는 독촉과 초과달성이 불패의 비결이었다.

그때 자장면을 빨리 빨리 시켜먹는 극성이 아니고는 궁기를 남보다 앞서
면할 기회가 쥐어지지 않았다. 점잖은 60~80년대의 약진은 불가능했다.

왜 그때 차분히 했으면 이꼴은 안됐잖나는 원망이 들린다. 당시에도
여론은 들끓었다.

일본서 "이타이이타이"병의 주범이던 공장을 들여 올때는 공해경고,
부익부가 부각될땐 소득균배의 외침소리가 작지 않았다.

하지만 박장군은 너무 단호했다. "키운 다음 나누자"였다.

가령 그가 그 여론에 영합해 이것저걸 다 챙겼다고 가정하자.

뭣보다 속도가 줄어 북한압도가 73년보다는 훨씬 늦었을 게고 또 달리지
않으면 쓰러진다는 당시 유행의 자전거원리대로 중도에 쓰러졌을 가능성
마저 배제할수 없다.

이제 세계인의 조소속에 우리끼리 책임만 떠넘겨야 득될게 없다. 시대
마다 역할은 다르게 마련이다. 박시대의 역할은 파종이었다.

웃자란 쭉정이를 그 뒤시대에 거둬내질 못한게 아쉽다.

그대신 노시대의 민주화 진척이 새시대의 키워드인 "문민"의 길 개막에
일정한 공을 끼쳤음도 잊어선 안된다.

겨레 특유의 신바람에 덧붙일 긴요한 덕성은 저 동양의 후예 인디오들의
석수정신이 아닌가,정신이 든다.

상하 모두가 좀더 고개를 낮추고 겸손해야 발전이 있다. 속이 비고도
꽉찬채 하면 오느니 퇴보뿐임을 알자.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