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3.1운동에 비견되는 중국의 5.4운동당시 민족자결과 자주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온 학생들은 거칠 것이 없었다.

이들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당시 북경대
총장은 흥분한 학생들 앞에 서서 학생의 본분을 강조하며 준엄하게 그들을
꾸짖었다.

그 총장은 꾸짖을 자격이 있다고 학생들이 인정할만큼 학덕을 갖춘 사람
이었다.

오늘날 총장의 모습은 사뭇 달라져 학문적 업적보다는 세일즈맨십이 강조
되는 세상이다.

4,5,6공화국에 걸쳐 장차관급의 고위관료를 지내며 행정의 달인이란 별칭
을 받아온 명지대의 고건총장(57).

세일즈맨임을 자처하고 나선 또하나의 총장이다.

질좋은 상품(인재)을 만들어 사회각분야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총장의
할일이라고 강조하는 그를 서울 연지동 기독교여전도회관 1109호실의 개인
사무실로 찾았다.

-요즘은 세일즈맨총장시대인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특별한 소신이라도
있으십니까.

"총장의 역할은 크게 봐서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품질좋은 상품을
생산해 내는 것입니다. 현실사회가 필요로하는 인재를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인재를 세일즈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훌륭한 총장이 되기
위해서는 세일즈맨십을 발휘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명지대의 경우 총장은 이 두가지를 한꺼번에 해야하는 부담이 있습니다.
우선은 제품부터 잘 만들어야 하고 돈도 끌어와야 하는데 대학이 돈을 끌어
오는 방법은 산학협력을 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다 알다시피 이제까지 산학협력은 주로 서울대 연대 고대만 혜택을
입었지요. 그래서 명지대는 이들이 하지 않고 있는 것을 집중 육성하는
차별화전략을 추진할 생각입니다.

즉 산업사회, 특히 중소기업이 현실적으로 필요로 하는 분야에 치중할
생각입니다. 그 분야란 기업의 경쟁력을 키우는데 필요한 생산기술과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생산기술은 우리나라가 어느정도 수준에 올라
있지만 디자인은 그렇지 못해요.

해서 디자인 조형연구센터건립을 우선 목표로 잡고 이미 나산그룹의 협조로
30억원을 들여 리서치파크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두번째로는 생명환경연구
센터를 만들 생각입니다"

-포부가 크고 구체적인데 좋은 인재의 확보도 병행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수한 학생을 끌어들이려면 좋은 교수진의 확보가 우선돼야 합니다.
다행히도 요즘은 우수한 교수가 많이 공급되고 있어 명지대에 영입되는
교수들의 수준이 일류대학수준과 맞먹습니다.

재정상 어렵기는 하지만 올해 이미 20명의 교수를 채용했고 30명을 더
뽑을 생각입니다. 훌륭한 교수진이 확보되고 차별화전략이 성공하면 우수한
학생들도 몰려들 것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대학이야기는 이쯤하고 고총장님의 옛날 이야기를 들어보지요. 행정의
달인이라는 별칭은 어떻게 얻게 됐습니까. 어려서부터 행정가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습니까.

"특별히 그런 꿈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서울대학교 학생시절에
학생회장한다고 2~3년 설렁설렁 지내다보니까 졸업하고 마땅히 갈만한 곳도
없더라구요.

그래서 고등고시를 준비했지요. 당시 학생회장출신들은 대개 현역국회의원
의 비서로 들어갔는데 자유당시절로 정치가 혼탁했고 별로 매력을
못느끼겠더군요.

합격이 되고 보니까 고향에서 군수한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무부를 지원했지요. 행정의 달인이라고 하면 쑥스럽고 행정에 대해 남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에도 사연이 있습니다.

시험에 합격하면 대개 1년반의 수습기간을 거쳐 보직을 받는데 1년반이
지나고 3년6개월이 돼서야 보직을 받았어요.

아직도 고시합격자로서 최장의 수습기간을 지낸 사람으로 기록을 갖고
있는데 이기간동안 남다른 시각을 갖게된 것 같습니다.

당시 행정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보는 시각을 알게된 거지요. 또다른 이유
라면 지방과 중앙을 3차례나 왔다갔다 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시각차를 알게
된거지요.

지방에서 근무하다보면 중앙의 탁상행정을 몸으로 느낄수 있는데 나중에
중앙에 올라왔을때 이를 토대로 탁상행정을 교정하려는 노력을 해봤죠.

마지막으로 관과 민사이를 들락거리기를 한 세번 했지요. 고위공직자로서
중앙의 관료만 했을 경우 얻지 못할 경험을 여기서도 얻게 됐어요.

행정의 출발점은 관료의 탁상이 아니라 시민의 일상생활속에서 나온다는게
바로 그거지요.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내무장관하던 시절인데 시위도중 부상한 학생을 전경과 마찬가지로 국공립
병원에서 무료로 치료해 주라고 지시를 했는데 당시 차관이나 차관보가
법리해석상 범법자인데 어떻게 국공립병원에서 무료로 치료해 주느냐고
못하겠다고 하더라구요.

그때 나는 관과 민을 왔다갔다 하다가 국회의원으로서 내무장관을 잠깐
겸직하던 시절이었는데 내 생각이 중앙의 관료들하고 다르다는 점을 알게된
거지요.

말하자면 상식선에서 출발해 시민의 입장을 생각하게 된 거지요. 행정의
달인이라기 보다는 행정을 보는 시각이 남들하고 좀 달랐던 것으로 생각
합니다"

-여러가지 별칭을 갖고 계신데 공직생활을 하면서 특별히 좌우명이라고 할
만한 것을 정해 놓으셨습니까.

"일부러 정해 놓은 것은 아니고 공직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터득한 수칙
같은 것은 있지요. 첫째는 지성감민이지요.

전남지사로 있을땐데 심한 한해가 드니까 광주의 나이많은 원로들이 "지사
가 무등산 정상에 올라 기우제를 지내야 한다"고 하더군요.

밤을 새워 현장상황을 파악하고 대책을 세우는게 지사의 할일인데 기우제를
지내라니 난감하더라구요.

지사는 지사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기우제를 지낸다고 하고 지사집무실에서
숙식을 했지요.

한 9일쯤 지나 잠깐 눈을 붙이고 있는데 빗소리가 들려요. 기분이
좋더군요. 두번째는 야당국회의원의 아들(고총장 부친은 6대국회때 야당
의원을 지냈다)로서 공무원 출발시점부터 우여곡절이 있었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공직에 있는동안에 청렴이라는 것을 체질화해서 지켰습니다.

전남지사시절에는 가친께서 중심이 돼 친지 가족들로부터 돈을 거둬
도지사판공비를 보내주셨습니다.

또 조직책임자가 되고 보니 나만 깨끗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기관장이 청렴을 솔선하는 것은 필요조건은 돼도 충분조건은 못된다는 결론
을 얻었지요.

어떻게 하면 이들에게도 청렴하도록 설득할 수 있는가 찾기위해 이책 저책
뒤지다가 목민심서 율기조항 청렴편에서 "군자는 안류하고 지자는 이류
한다"는 대목을 찾았지요.

즉 자기자신에게 이롭기 때문에 청렴해진다는 얘기지요. 이거다 해서
시장할때도 시청공무원들 모아놓고 지자이류을 강조했어요.

그대신 청렴한데 대한 대가로 인사에서 깨끗한 사람은 우대해줬지요.
조직사회에서는 신상필벌이 첫번째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아랫물 윗물해서 말이 많은 물맑기운동도 사실 똑 같은 겁니다.
윗물이 맑다고 해서 아랫물이 저절로 맑아질 수는 없는 겁니다.

윗물이 맑으면서 아랫물도 맑게하려면 공직자 개인의 부패행태와 의식,
사회의 부패요인, 이것을 예방하고 감시하는 시스템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야
합니다.

세번째는 일일신.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시민생활에 발맞추기 위해서는
공직자도 발빠른 변신을 해야 한다는 거지요"

-30대에 전남지사, 40대에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 교통부장관 농수산부장관
12대국회의원 내무부장관을 거쳐 서울시장까지 지내는등 공무원으로서 올라
갈수 있는 최고의 자리를 차지했었는데 혹시 아쉬움은 없습니까.

"여러부처의 공직을 거쳤다는 점에서 행운이 따랐습니다. 별 아쉬움은
없지만 공직에 있을때 더 잘 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마음이 듭니다.

서울시교통대책의 일환으로 버스노선을 바꾸고 도심진입 직행버스를
만드는등 많은 것을 계획하다가 시장을 그만두는 바람에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좀더 빨리 서둘러서 추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요"

-책임을 미루는 스타일이라는 얘기도 있는데.

"이권이 관련되거나 또는 아주 중요한 정책의 결정은 공개적으로 하자는
주의를 지켜왔어요.

시장이 돼보니까 밑에 사람들이 윗사람 눈치보는 경향이 너무 심하더군요.
예를 들어 큰 공사를 해야하는데 지명을 할까요 수의계약을 할까요 하는
식이지요.

나는 절차를 완전히 공개하라고 지시했고 공사계약열람실이라는 것을 시청
출입문옆에 설치하기도 했어요.

중요한 문제는 언제나 정책회의라는 것을 열어 여러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결정을 미룬 적은 없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나서 결정은 그자리에서 내가 했지요"

-공직생활을 시작하면서 부친과 약속한 것이 있다고 하던데.

"세가지가 있었습니다. 돈에 깨끗하고, 누구 사람이라는 말을 듣지 말고,
술 잘 먹는다는 소리 듣지말라는 것이었지요.

술을 빼고는 다 잘 지켰습니다"

-이제 행정가에서 대학총장으로 변신해 새로운 경력을 쌓고 계신데 혹시
민선시장후보로 나올 생각은 없습니까.

"그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자꾸 말이 나오는 것이
바람직 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별로 매력을 못느끼고 있어요"

< 대담 = 김형수 국제1부장 >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