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렇듯 신소재개발에 뛰어들어 참담한 실패를 기록하는 동안에도
행남사와 행남특수도기의 매출은 매월 늘어 그때까지의 시설로는 증가하는
물량을 생산해 내기에 역부족이었다.

이 증가물량을 소화할 또다른 신공장증설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만들기만하면 팔릴 상황인데 시설을 늘리지 않을 기업인이 어디에
있겠는가.

주저않고 나는 공장 증설을 결정했다.

목포공단안에 추가로 8,000여평의 땅을 사들여 공사비 21억원을 들이고
연간 1,000만개의 스톤웨어를 생산할수 있는 행남특수도기의 제2공장인
지금의 석현공장을 착공한 것이다.

그뒤 1978년12월에 준공된 이 석현공장은 국내 뿐만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최신식 자동화설비를 자랑하는 현대식 공장이었다.

이에따라 행남사 전체사원은 2,000명이 넘게 되어 당시 목포는 물론
전남도내에서 가장 많은 인력을 고용하는 회사가 되었다.

행남특수도기에서 계속 생산해오던 스톤웨어 식기는 미국의 유명 백화점에
진출하면서 행남사의 품질에 대한 수입상들의 신뢰도를 한껏 높이게
되었는데 고급상품만을 취급하는 백화점인 블로밍데일을 비롯 세계 최대
백화점인 씨어즈로벅 제이시 페니 메이시 메이컴파니 몽고메리워드등 유수한
백화점들로부터 주문이 끊이질 않았다.

수출은 행남특수도기의 엄격한 품질관리로 해외수입선으로부터 단 한건의
클레임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주문량도 잘 소화해냈다.

지금까지도 행남사는 해외수출에서 단 한건의 클레임도 발생시키지 않고
있다.

이같은 철저한 품질관리제도를 인정받아 행남사는 공업진흥청으로부터
수출자체검사의 허가를 얻어 자체검사원의 검사만으로 감독기관의 수출검사
를 대신할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 품질관리운동은 한창 활발하게 추진했던 공장새마을운동과 함께
이뤄졌는데 그결과 77년11월에는 제1회 "전국공장새마을비교평가대회"에서
전국 3만여공장가운데 최우수업체로 선정, 대통령단체표창과 새마을
훈장협동장을 받게되는 영광을 안았다.

그동안 행남사는 같은 자기 생산업체인데도 내수용과 수출용으로 생산품목
을 구분해 행남사와 행남특수도기(주) 이 두개의 회사를 별도로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이 두개의 회사를 별도로 운영하는데 여러가지 관리손실이 크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2중의 고정비와 관리비가 지출되고 있었고 대외관계에 있어서도 구매 판매
등 모든 체제가 이원화되고 중복되어 있어서 이를 절감시킬 조치가 필요
했다.

따라서 나는 1980년 행남사와 행남특수도기 이두회사를 합병하여 "주식회사
행남사"로 개편했다.

기술개발에도 꾸준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76년 나는 기존 행남사의 경우에도
상아빛이 나는 고급도자기인 아이보리차이나 제품을 개발하여 시중에
내놓으면서 식기의 독성문제를 완전히 제거하고 특히 백성전사지를 세계
최초로 개발하여 하회서공방법을 개선했다.

뿐만아니라 81년에는 목표관리제도의 일종인 "부분업적평가제도"를 도입
하여 사내 각 공장과 부서를 독립운영단위로 개편하였다.

이에따라 상호경쟁과 상호거래관계를 명확히 하고 각단위엔 성취 가능한
적정선의 목표이익을 부여하여 이의 달성여부를 평가하는 제도를 도입해
운영함으로써 87년에는 한국생산성본부로부터 한국 일본의 대표적인 관리
개선 사례로 선정되기에 이르렀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