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보는 사가의 반란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직접 자기가
나서서 본보기로 철저하게 분쇄하고,무자비하게 단죄하리라 마음먹고
현지에 임했지만,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가
않았다.

일국의 실권자가 한낱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직접 현지에까지
나타났다는 사실이 어쩐지 좀 모양 같잖았고,또 비록 지금은 반란
사족의 수괴가 되었지만,지난날에는 같이 왕정복고를 위해 투쟁했고,유신후
에는 태정관의 중신으로 함께 국정을 이끌어 나갔던 동료인 에도를
직접 자기 손으로 처단하기위해 왔다는게 인간적으로는 결코 떳떳하지가
못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사실이 반란 진영에 알려지면 사족들의 적개심을 한층 부추길것
같기도해서 오쿠보는 복면을 하고 상륙한 것이었다.

정부군은 삼방향에서 사가로 진격해 갔다.

하카다에 상륙한,오쿠보가 직접 거느리는 오사카 진대의 부대는
사가를 향해 남하해 갔고,구마모토의 진대 병력은 사가가 북쪽이기
때문에 북진을 했으며,히로시마에서 출동한 진대병들은 동쪽으로부터
서진을 하였다.

정부군은 이제 모두 징병제도에 의해서 의무적으로 복무하는 병사들이어서
지난날의 사무라이정신같은 것은 거의 찾아볼 길이 없었다.

그러나 신예무기에 서양식 전법으로 훈련을 했기 때문에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사가성을 점령한 반란 사족들은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들은 "살판"났다고 생각하는 터이라 목숨을 초개같이 여겼다.

결사대를 수없이 조직해서 파상적으로 정부군 속으로 돌격해 들어가곤
했다.

그러나 밀물처럼 밀어닥치는 정부군을 감당해낼 길이 없었다.

23일,그러니까 사가성을 점령한 닷새뒤에 에도는 몇사람의 젊은
심복을 거느리고 심야에 사가성에서 빠져나가 가고시마로 향했다.

사이고에게 원군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사가성을 점령한 즉시 에도는 가고시마와 도사,그리고 조슈등 가까운
이웃의 동지들에게 비마를 띄워 그 사실을 알리고,봉기를 촉구했었다.

그러나 곧 정부군의 포위 공격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이웃지방의
동향을 알길이 없었다.

자기가 직접 가고시마로 가서 만약 그곳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면
사이고를 붙들고 늘어져야겠다 싶었던 것이다.

에도가 가고시마에 도착한 것은 3월1일이었다.

그날 사가성이 정부군에 의해서 함락되어 사가의 반란은 막을 내렸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에도는 때마침 만지(만지)온천에 가있는 사이고를
그곳까지 찾아갔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