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건물을 짓는 목재들은 다른 사람의 공장건물을 뜯어다 짓기로
했기 때문에 별로 어려움은 없었지만 문제는 그것을 지탱할 2층
목조건물의 8개대형기둥이었다.

벌채가 힘든때였으므로 목포 인근에서 그것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다행히 큰매제인 천철수씨가 해남자신의 선산에서 기둥목을 베어서
쓰라고 해 그것을 운반하느라 대형 목선을 빌려 네번이나 왕복해야했다.

그러나 정작 힘든것은 소성가마(로)를 축조하는 일, 당시 국내의
기술로는 가마는 커녕 자기도 못만들 정도였기 때문에 자연 아버님께서
익히 알고 지내던 아리타"요업시험장"의 소장을 통해 2명의 일본기술자를
불러와 비싼 노임을 주고 짓는 수밖에 없었다.

축로에는 두달이 걸렸는데 축로에 필요했던 내화연와는 당시 전시물품
으로 지정되어서 구하기가 힘들었는데도 다행히 목포에 있는 조선내화
공장을 통해 내화물을 가져다 썼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시설물들이 요로1기,성형기5대.요로는 도염식
각요로 길이10m,폭5m,높이2m정도에 유연탄을 지피는 탄구멍이 양편으로
네개씩 있어서 먼저1,000도이하로 구워낸 다음(예소성),1,000도이상
1,300도까지 환원소성을 할수있는 것이었다.

종업원은 30명정도가 필요했다. 자기를 구워낼 기술인력으로는 젊고
힘있는 사람들이 적격이었지만 당시 젊은 사람들 대부분이 징용대상
이었기 때문에 중년이상의 나이든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전통적으로 도자기를 굽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첫 화입식때
전종업원들이 목욕재계한 다음 푸짐한 제상을 준비해 기원제를 지냈다.

하지만 이렇게 화입식을 한지 48시간만에 나온 첫 소성품은 기대했던
제품과는 영 딴판이었다.

백자제품 고유의 색깔이 아니고 철분때문에 군데군데 청색반점이 묻어
났던 것이다. 요즈음이야 탈철시설이 되어있어서 아무 문제가 안됐겠지만
그때는 그런 시설이 있을리 만무했으니 자못 심각했다.

그 일로 해서 나는 또 부랴부랴 아리타 요업시험장으로 가 한달동안
그곳에 있으면서 원인제거를 위한 조사작업을 해야만했다.

당시 일제는 어렵사리 생산해낸 행남사의 자기제품을 관납물품으로
지정해 생산량의 전부를 광주에 있는 "3관구사령부"로 납품하도록
조치해버린 것이다.

울며 겨자먹기로 겨우 생산비정도의 값으로 납품을 하지않으면 안될
지경이었다.

당시 일제는 식민지 조선의 경제통제를 용이하게 하기위해 관납제품에
대한 가격계통을 공정가격 정지가격 조정가격 이렇게 세가지로 두고
있었는데 자기는 공정가격으로 통제가 되었고 사발 1개의 공장도가격이
40전, 도매가격이 51전,소매가격이 80전으로 묶여서 거래되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전시경제체제라 식기의 구득난이 심해 자기 생산품의
거의 대부분을 관수요로 충당,국내유입이 불가능했기때문에 시장에서는
사기 밥그릇이 귀한 대접을 받았다.

당시 사기 밥그릇 하나에 목포에서는 쌀 한되, 시골에서는 쌀 두되와
맞바꿨으며 도시에서는 장판 두장하고 바꿨다.

그러니까 이런 시세좋은 시절에 나는 애써 만든 자기제품들을 자유로이
팔지도 못하고 일제에 강제로 납품해야했으니 그때의 심정을 말해
무엇하겠는가.

(한국경제신문 1994년 9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