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7월9일 금요일 오후 홍재형재무부장관은 여의도 순복음교회 맞은편
기보빌딩으로 간다. 최종 목적지는 이 빌딩 8층 민해영기술신용보증기금
이사장실. 민이사장을 찾아간 것은 물론 아니다. 그 시간쯤 민이사장은
부산에 있는 기술신보 본사사무실에서 근무중임을 그는 잘 안다.

국회의사당에서 그리 멀지않은 기술신보 이사장실. 이 방은 국회를 가야
할 일이 많은 재무부장관이 자주 들르는 곳이다. 그는 여기서 국회답변
자료를 검토하거나 잠시 휴식을 취한다.

방주인인 민이사장이 주로 부산에서 근무하는 탓에 이 방은 민이사장
방이라기보다는 재무부장관의 여의도 "별실"쯤으로 불린다. 일반 직원들은
물론 이사장실 여비서조차도 그래서 재무부장관의 출현은 낯설지 않다.

이날도 직원들은 김용진세제실장(현차관)을 대동한 것을 보고 "국회
자료를 검토하러 들렀겠거니"하고 지나친다.

그러나 홍장관의 이날 이사장실 "출현"은 국회업무와는 상관없었다.
전날인 8일 대통령으로부터 실명제실시에 관한 지시를 받고 사람 눈을
피해 이곳에 온 것이다.

KDI팀의 실명제 실시 시안을 브리핑 받기위해 "접선"장소를 과천이 아닌
이곳으로 택했을 뿐이다. 홍장관일행이 방에 들어간 직후 양수길부총리
자문관과 남상우KDI부원장이 들이 닥친다. 홍장관과 김실장은 이들이
내놓은 시안을 보고 깜짝 놀란다.

대통령은 그냥 보고를 받아 보라고 한줄만 알았는데 시안 첫페이지에는
"김영삼"이라는 한자사인이 큼지막하게 쓰여있는게 아닌가.

KDI팀의 보고보다도 더 빠르게 시안의 페이지를 넘기던 홍장관과
김실장의 얼굴엔 또한번 긴장감이 감돈다.

"긴급명령을 통해 조기에 실시하다-" "대통령께서 보신거지만 다시 한번
검토해 봅시다. 우리 세제실쪽에서도 팀을 짤테니 함께 작업하면 잘
될겁니다" 홍장관은 짧게 말을 끊는다. 그러면서 그의 뇌리엔 "올 것이
왔구나"는 생각이 섬광처럼 스쳐지나간다.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12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홍장관은 임지순
소득세과장을 부른다. 그리고 서류봉투 하나를 건네준다. KDI시안은
이렇게해서 재무부의 실무팀에게로 넘어온다.

재무부팀과 KDI팀의 첫 만남은 14일 저녁 서울 휘문고 맞은편 금자탑
빌딩에서 이뤄진다. 이날은 양자문관이 국제투자연구원설립용으로
위장한 사무실을 "오픈"한 날. 자리를 같이한 "연구원 창립멤버"는
모두 8명.

KDI팀에선 양박사 남박사 김준일박사가,재무부팀에선 김실장 김진표국장
임과장 진동수과장 백운찬사무관이 회원이 됐다. 멤버들은 창립 첫날부터
"이론과 실제"사이를 놓고 격론을 벌인다.

초기의 조율작업은 역시 간단치 않았다. "뭐랄까요. KDI안은 좀 "과격"
했다고 할수 있었어요. 그래서 작업 초기엔 KDI팀과 우리가 서로 상대방을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어요. 시간도 많이 걸렸고요"홍장관이 전하는 당시
분위기다.

KDI팀과의 실무조율에 참여했던 김진표국장도 "KDI안을 솔직히 평가하라면
"경제학자들의 이상론"이라고 할 수 있어요. 거래실명화만하더라도 너무
완벽했어요. 금융자산 동결조치 비슷한 느낌이 들 정도였거든요.

실명전환기간을 2주일정도에 끝내고 실명확인작업도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자는 거였어요. 그래서 조율작업은 KDI안중의 강한 것을 약하게 만드는
게 주조를 이뤘죠"라고 말한다.

경제학자들이 만든 "강한 안"을 실무경험이 풍부한 재무부 관리들이
현실감으로 "분칠"했다는 얘기다.

주요 분칠내용중의 하나가 실명전환의무기간. "시안에서는 실명전환의무
기간을 2주일로 했어요. 2주일이 부족하면 한번만 더 연장해 한달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이었지요"(양자문관) 그러나 재무부는 금융기관의
업무량을 추정해본 결과 적어도 2개월의 기간은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실명전환의무계좌를 집계해보니 1억3백만건(점포당 5천6백40건)이나
됐어요. 한달가지곤 아무래도 힘들다는 결론이었지요. 실무를 맡아야
하는 재무부로선 한달안에 실명전환을 모두 하기엔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두달로 늘렸지요"(임과장)

두달로 늘린게 "현명한 선택"이었는지 "치명적 실수"였는지를 판단하기엔
아직 이르다.

"실명제 실시단에 순수 민원용으로 설치한 전화만 15대였는데 두달동안
15대 모두 수화기를 놓을 틈이 없을 정도로 문의전화가 많았었다"
(백사무관)는 것처럼 두달이 결코 짧지 않았다는 평가와 "실명전환기간이
늘어나 9,10월대란설이 유포되는등 괜한 불안감만 조성했다"(양자문관)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는 상황이다.

실명전환기간이 "약화된 것"이라면 "강화된 것"은 비밀보장조항.

"실명제는 그 자체가 상당한 쇼크였습니다. 쇼크의 중화가 필요했지요.
대통령께선 실명제를 지렛대로 삼아 정치개혁의 완성을 생각했으나
그러기 위해서는 실명제쇼크를 최대한 누그러뜨리는 일이 필요했고
"쇼크중화"는 "금융거래의 비밀보장"이 관건이었지요.

적어도 비밀보장만큼은 시행초기에 강력하게 집행해서 우선 국민이
믿도록 해야 했습니다.

작업팀에선 실명제가 관행으로 정착되려면 적어도 10년은 걸릴 것으로
봤고 그 초기 1,2년은 비밀보장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지요"
(임과장) 재무부팀의 "비밀보장"에 대한 의지는 "실명제 작명"때도
그대로 나타난다.

24일 저녁 8시 금자탑빌딩 회의실에서 가진 "작명"작업에서 이들은 82년
제정된 "금융실명거래에 관한 법률"에 "비밀보장"이란 단어를 첨가할 것을
고집한다.

결국 "금융실명거래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재정경제명령"이란 긴 이름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해서 가닥을 잡은 시안이 완성되고 "시안"은 28일 대통령에게
보고된다. 대통령은 "조기실시"를 지시한다. 조기실시가 확정되자
실무작업팀은 29일 과천아파트(505동 304호)에 입주한다.

곧바로(30일부터) 긴급명령의 구체적인 시행안 작성과 독해작업에
들어갈 수밖에.

작업 총지휘봉은 김용진실장 손에 넘어간다. 법조문작성,세부지침,
발표이후의 행동계획등이 하나씩 만들어진다.

임과장이 D-데이 전후의 전반적인 타임스케줄과 대통령지시문 장관
발표문 금융기관지시사항등을 맡고 진과장과 최규연사무관은 금융기관
업무지침작업에 매달린다. 국민은행의 김혜영과장이 이를 도왔다.

구체적인 법조문을 짜는 작업은 임동빈사무관과 방기호법제처법제관에게
돌아갔다. 국세청의 백승훈.최회선 두 조사관이 작업물을 타이핑해냈다.

발표직후 병원 실려가 그러는 사이 금자탑빌딩에선 이부총리와 홍장관이
가닥을 치고 물꼬를 터주었다. 김실장과 김국장은 아파트 작업내용을
그리로 운반하고 장관들의 지시사항을 다시 아파트로 나른다.

아파트에선 다시 "독회"를 통해 하나 둘씩 다듬어진다. 단어 한자의
적법성을 놓고 한두시간 토론하기는 예사였다. 밤늦게 시작된 회의는
동틀 무렵에나 끝나기 일쑤였다.

"재무부 관리들이 열심히 일하는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 독종인줄은 정말
몰랐어요. 도대체 잠을 자지 않아요. 아마 막판에는 하루 한두시간정도
눈을 붙이고 일했을 겁니다" 합숙작업에 참여했던 김혜영국민은행과장은
혀를 내두른다.

하기야 최사무관은 "8.12발표"와 함께 곧장 병원으로 실려 갔으니
그럴만한 평가도 나올만 하다.

이런 밤샘작업을 거치는 과정에서 작업팀은 또 한가지 고민에 빠진다.

"과거를 어디까지 물을 것인가"였다. 구체적으로 실명전환의무기간
이후에 명의전환을 하는 자산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와 자금출처조사
문제등 두가지.

첫번째 고민을 풀기위해 실무작업팀들은 우선 "82년 실명제법"을 들여다
본다. 여기에는 "과징금을 5%만 내면 비실명인출이 가능"토록 돼 있었다.

KDI시안에는 "의무기간내 실명전환하지 않는 비실명자산은 실명제 실시후
2년경과시까지 매년 원본의 10%를 과징금으로 물고,1년의 예고기간(이
기간중에도 10%를 부과해 합계 30%)을 거쳐 원리금전액을 국고귀속"토록
하고 있다.

그러나 전액국고귀속은 사유재산권보호차원에서 문제가 있다는 재무부의
신중론이 승리한다. 그대신 증여세최고세율(60%)을 감안, 6차연도까지
연10%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96.75%라는 고율의 이자.배당세를 징수하는
방식이 채택된다.

다음은 자금출처조사. "82년 실명법"과 민주당안은 7백만원이상의
미성년자 고액계좌를 제외하고는 자금출처조사를 일절 면제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러나 이는 과거의 탈세를 인정하는 조세사면을 선언하는 꼴이 된다.
문민정부가 추구하는 "경제정의"와는 맞지 않았다. KDI시안에서부터
"일정선"이상을 국세청에 통보하자는 견해가 제시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일정선"을 얼마로 하느냐였다. "당초안에서는 세대주와
비세대주를 구분하고 동시에 연령대를 구분했지요.

40대이상 세대주인 계좌주의 경우를 예로 들면 국세청 통보 하한선을
5억원으로 잡아보기도 하고 3억원으로 잡아보기도 했습니다.

비세대주의 경우에는 세대주에 대한 금액의 50%로 했고요. 그러나 이런
구상은 말그대로 "구상"으로 끝났죠. 전국 1만5천개 금융점포의 실명전환
계좌를 모두 모아 인별로 합산하는게 불가능하다는 지적이었지요. 그래서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인별합계대신 계좌별 금액을 기준으로 채택할 수
밖에 없었어요"(양자문관)

결국 국세청통보 면제한도는 세대주와 비세대주의 구분을 없애고 실명
전환된 계좌별로 20세미만의 경우 1천5백만원,20대 3천만원,30대이상
5천만원으로 하는 것으로 최종 결정이 난다.

그러나 자금출처조사문제는 실명제 실시이후 국민들을 가장 불안하게
만든다. 8월31일과 9월24일 두차례에 걸처 자금출처조사완화를 골자로
하는 보완대책을 만들어야만 했다.

정보샌것 아니냐 비상 극도의 보안속에서 차곡차곡 작업을 진행중이던
실무팀은 8월 3일 저녁 아연 긴장한다.

다음날 아침자로 나온 K신문 가판엔 "덤핑채권 천억대 나돈다"는 제목의
기사가 1면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것 아닌가."

명동 여의도등 증권가에 출처불명의 CD(양도성예금증서) 회사채등이
단일창구를 통해 한꺼번에 1백억~2백억원씩 대량으로 쏟아져 나와
자본시장에 비상이 걸렸다.

매도측은 거래조건으로 전액 1만원권의 현찰을 요구.특정세력이
금융실명제 실시시기가 앞당겨질 것이라는 점을 간파한것 아니냐는
견해도." 누가 읽어도(물론 사후적인 얘기지만) 실명제가 조만간
실시되는 것을 아는 사람이 무기명자산을 현금화하려는 노력으로 밖에
볼수 없는 기사내용이었다.

작업팀에 비상이 걸린다. "실명제가 샌 것 아니냐"며 작업팀의 정보망이
풀가동된다. 결론은 그런 "움직임"은 실제 없었다는 것.

하지만 한창 막바지 작업중에 터져나온 이 기사는 실명제 실시시기를
앞당기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

"다행히도 다른 매체에서 이 기사를 받지 않았어요. 또 이 기사로인해
금융실명제 실시설이 유포되거나 금융증서의 투매사태가 벌어지지도
않았고요. 그러나 실무진은 시간이 경과할 수록 의외의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을 절감했어요. 그래서 시행일자를 최대한
앞당기자고 건의했죠"(홍장관)

실명제 준비작업은 KDI팀이 "화분에 실명제란 꽃을 심고 화려하게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면 재무부팀은 "그 꽃이 시들지 않고 싱싱하게 살아남을 수
있도록 토양을 다지는데" 더 많은 신경을 썼다고 할 수 있다.

1년이 지난 지금도 재무부는 물주는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당시 팀장
이었던 김용진세제실장은 잠시 관세청장을 거쳐 지금 차관으로 있고
임지순소득세과장은 실명제의 지속적 추진과제중의 하나로 올해 세제
개편에서 금융소득 종합과세안을 마련했다.

백운찬 최규연 임동빈사무관은 지금도 금융실명제실시단에서 각각 총괄반
금융반 조세반에서 일하고 있다. 아직도 풀리지않은 실명제 매듭을 풀어
나가는게 그들의 주된 업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