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대신증권을 창업한이후 나는 계속해서 관계회사를 설립해 나갔다.
그것은 주로 금융업에 관련이 있는 기업들이었는데,이는 오직 금융업에만
전념하여 국민경제발전에 밑거름이 되고자했던 나의 경영철학에 기인한
것이다.

먼저 1984년에 설립한 대신경제연구소는 일본의 노무라종합연구소를 방문
했을 때부터 꿈꾸어 왔던 것이었다. 경제연구소는 대신그룹의 "싱크탱크"
역할을 물론, 국내외 자본시장 및 기업에 관한 전문적인 조사연구자료를
제작함으로써 두뇌집단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특히 설립하던 해부터 매년 실시하고 있는 "최우수상장기업상"은
우리나라 상장기업의 건전한 경영환경마련에 일조하고 있다.

1986년 설립한 대신개발금융은 우수한 기술과 아이디어를 갖고
있으면서도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유망중소기업을 지원해주기 위해
설립한 벤처기업이다. 기술이 있는 자가 살아남는 치열한 국제경쟁시대에
나는 이 벤처사업이 국민경제의 경쟁력을 강화하는데 꼭 필요한 사업부문
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나는 주변사람들이 시기상조라며 반대하는 것을 무릅쓰고 1976년 업계
최초로 전산시스템을 가동시키는등 업무전산화를 추진해 왔었다.

그러던중 계열사의 업무지원을 강화할 필요성과 함께 미래산업의 주역이
될 정보.통신산업에 진출하기 위해 1987년 대신정보통신을 설립하게
되었다.

설립하던 해 12월 정보통신은 당시 국내굴지의 대기업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소유하고 있던 초대형 컴퓨터인 IBM3090-120E시스템을 도입하는등
과감한 투자로 업계를 선도해 나가고 있다.

또한 금융의 국제화, 자율화, 증권화현상의 진정으로 유가증권의 가격
변동요인이 복잡해짐에 따라 1988년에는 대신투자자문을 설립하였다.

대신투자자문은 금융.경제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고객들에게
광범위한 자문서비스를 제공해 오고있다.

한편, 나는 국민 소득이 향상될 수록 보험산업이 국민경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될 것으로 확신하고 보험업계로의 진출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왔다.

이는 내가 오랜동안 꿈꾸어오던"금융전업그룹"을 이루기 위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에서 1958년이후 보험업 신규허가를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꿈을 이룰수는 없었다.

그러던중 80년대후반 선진국의 강력한 통상압력에 보험산업개방도 포함
되자 정부에서도 마침내 국내자본의 해외유출을 최소화하자는 측면에서
보험사 신규설립을 허용하기에 이르렀다.

이에따라 1988년7월30일 우리는 전국 규모의 생명보험 신규설립허가
서류를 재무부에 접수시킬수 있게 되었다. 마감결과 신청한 기업수가
17개사에 이를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그로부터 마음졸이며 기다리던 8개월이 지나고 1989년4월15일 정부는
대신생명보험을 비롯한 6개 생명보험사의 설립허가를 발표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회사전체는 온통 축제분위기에 휩싸였다.

드이어 대신생명은 1989년6월20일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정식출범하게
되었다. 대신생명은 영업개시 5개월만에 신설사중 최초로 총자산
1천억원을 돌파하는 등 "보험도 대신"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착실하게
성장해 나가고 있다.

대신생명보험이 설립됨으로써 나는 오랜 숙원이던 종합금융그룹의 꿈을
이루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1990년 대망의 새해아침에
신년사를 통해 그룹체제를 공식 선포하게 되었다. 지난날의 고락을
회고하면서 참으로 벅찬 감회를 느끼지 않을수 없었던 순간이었다.

증권업이 자본주의의 꽃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확신만 가지고 증권업에
뛰어든이후 "박황사건"등 온갖 풍상을 겪으며 이룩한 것이기에 그 기쁨은
더욱 클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