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0년대후반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철강 다자간협상이 벌어졌을 때의
얘기다. 협상을 마친 한국대표는 "모든 것이 우리 뜻대로 다 잘됐다"고
본부에 보고해 왔다.

"협상 성공"보고에 접한 본부의 안도감은 그러나 잠시. 협상은 보고와는
달리 "완전실패"로 판명났기 때문이다. "성공"이 "실패"로 바뀐 경위는
이렇다.

협상대표는 철강기술용어에 시종 신경을 곤두세우다 그만 협상상대국
대표의 "can''t"를 "can"으로 잘못 알아 들었던 것이다. 철강분야에 대한
협상대표의 무지가 빚어낸 비극이었다.

비극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지난 4월 농림수산부장관의 전격경질을 몰고온
UR(우루과이 라운드)농산물개방 이행각서 파동도 마찬가지다.

작년말 UR 최종합의안이 타결될 당시 "무지의 소치로" 농산물의 종량세와
평균감세감축률 관련사항을 협상대상에서 빠뜨렸다가 뒤늦게 이를 포함
시키느라 법석을 떤 것.

농림수산부 관료들은 UR협상대상국들로부터 "협상할 때는 언제고 지금와서
왜 이러느냐"는 핀잔과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아마추어 협상팀의
능력부재가 빚은 해프닝이었다.

경제관료들중에 전문가가 드물다는 단적인 예다. 주요부처 핵심 당국자들의
경력을 보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수출드라이브에서 산업기술드라이브로"
정책기조의 일대변혁을 외치고 있는 상공자원부도 대부분의 담당국.과장들은
소관분야의 문외한들이다.

산업기술.기계소재.전자정보.섬유화학등 산업관련 4개국의 국장 가운데
해당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가"는 단 1명에 불과하다.

체신부도 핵심요직이라고 할 수 있는 정보통신.전파관리국장등도 해당분야
전문가들이라고는 볼 수가 없다.

이건 특정부처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어느 부처나 마찬가지다. 지난달
농림수산부차관으로 자리를 옮기기까지 2년여동안 나라살림을 꾸렸던
이석채 전경제기획원 예산실장.

재직기간동안 예산개혁등 굵직한 작업을 진두지휘한 그다. 그러나 정작
예산실장으로 부임하기 전까지만 해도 "예산"업무를 다뤄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조순전부총리가 재임시절 "경제관료중엔 왜 이렇게 전문가가 없냐"고
한탄했을 정도다. 지금은 고인이 된 어느 장관도 "우리 사무관들이 어째서
모두 장관트레이닝 코스를 밟아야 하는가"고 개탄했었다.

물론 과천에 전문가가 전혀 없는건 아니다. "전문가"로 분류될 수있는
관료들에게 "제 자리"가 주어지지 않을 뿐이다.

예컨대 해외주재관을 2-3년씩 지내고온 "지역전문가 후보생"들이 자신의
경력을 계속 살릴 기회는 거의 없다.

스스로도 경력을 살리려고 하지 않는다. 상공자원부의 역대 주미상무관
출신중에서 제대로 "빛"을 본 사람이 없다.

지난해까지 EU(유럽연합)주재관을 지낸 L국장은 산하연구기관에 파견나가
있다. 전문가를 "전문가"로 키우지 못하는 주된 이유는 보직순환배치에만
급급하는 인사제도에 있다.

도무지 한 자리에 진득이 놔두는 법이 없다. 전문가를 우대하는 시스템이
없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보자.

상공자원부 L과장은 올해가 과장10년째다. 과장보직도 10번째다. 평균
1년에 한번씩 과장자리를 "섭렵"한 셈이다. 대미통상 주무부처인
상공자원부 미주통상과장직은 새정부 출범이후 1년남짓새 3번이나 바뀌었다.

업무를 좀 파악할라치면 바꿔치는 것이다. 이게 "인사가 만사"라고 강조
하고 있는 문민정부의 파행적인 인사다.

농림수산부는 UR협상이 진행된 지난 7년동안 담당국장을 무려 9번이나
갈아치웠다.

"이런 식의 인사제도는 마치 축구선수 1년시키다가 야구배트를 1년
들게하고, 다시 농구코트에 1년간 내몰았다가 이번엔 테니스라켓을 쥐어
주는 꼴"(전성철 미국변호사)로 비유할 수있다.

경제관료들 자신은 변명한다. "행정"만 잘하면 되지 꼭 "전문가"가 돼야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전문적인 일은 해당 연구소에서 가장 잘 압니다.
실무적인 문제는 업계가 가장 잘 알고요. 관료야 이들의 의견을 잘 취합해
정책을 결정하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노동부 S국장).

그렇긴 하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의 문제다. "운동신경(행정관리능력)만
있으면" 축구건 야구건 자유자재로 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면 지나친
착각이다.

발솜씨에 특기가 있는 선수에게 야구유니폼을 입혀 막바로 실전에 투입
하면 한동안의 시행착오는 불가피하다.

관료집단에 비유하면 그건 행정공백이다. 그 비용은 국민경제 전반에
고스란히 돌아온다. 세상이 전문화되고 다기화될수록 경제관료들에도
전문성이 필요해지는건 당연하다.

시대의 대세이기도 하다. 내무부등 일반행정부처의 관료들이라면 "행정력"
만 강조될 수 있겠지만 경제관료들엔 거기에다 "전문성"이 추가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최소한 "지역"이나 "분야"별로 전문가들이 실무총책임을 맡는 국장자리에
까진 오를 수 있게 하는 인사관행의 제도화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지금은 "총괄"자로 시작하거나 "정책"자로 끝나는 부서를 거쳐야만 요직
에도 앉고 승진도 순조롭게 돼있다.

이런 식으론 전문가들이 발을 붙일 수가 없다. 사회학에서 말하는
"모라토리움 신드롬"만 확산시킬 뿐이다.

"자신의 책임하에 사회생활을 해야 할 나이임에도 남에게 의존하는게
타성이 돼버리는 현상"이 모라토리움 신드롬이다.

지금은 우리 관료들이 "전문적인 것은 연구소나 민간기업의 머리를 빌리면
된다"는 타성과 미몽에서 깨어나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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