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의 하나로서 제정일치와 신도를 국교로 하는 정책을 채택해서 국민
교화를 전국적으로 꾀하였다.

신도는 일본 민족의 전통적인 신앙으로서 황실의 시조인 아마데라스오
미카미와 백성의 선조인 여러 신들을 숭배하는 종교인데,그것을 국교로
지정하여 숭상하고 적극적으로 권장해서 국민들의 사상을 애국의 길로
귀일시키려는 시책이었다.

단기적으로는 전국에 팽배한 반정부적인 불평과 불만을 종교의 힘으로
잠재우려는 의도였고, 장기적으로는 신도로써 국민의 사상을 하나로
결집해서 새로운 일본을 강력한 국가로 만들어 나가려는 정책의
일환이라고 할수 있었다.

그리고 민란도 민란이지만,사무라이들의 불만이 자칫하면 대규모 반란
으로 터져나올 것을 우려하여 그에 대한 대책을 적극적으로 강구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대책은 결국 병제의 개혁논의로 이어지게 마련이었다.

그 문제에대한 대논쟁이 각료회의에서 무려 수일간에 걸쳐서 벌어졌는데,
의견이 두갈래로 갈리었다. 오무라와 기도고인을 비롯한 조슈파는 이
기회에 징병제를 강행하여 사무라이들이 아닌 농병으로 정부 직속의
상비군을 설치해서 사족의 반란에 대비해야 된다는 주장이었다.

그에 대하여 오쿠보는 정면으로 반론을 제기했다. 징병제는 이상이기는
하나 때가 아직 이르며,만약 그것을 단행해서 농병으로 사족을 누르려고
하다가는 오히려 긁어 부스럼을 일으키는 격으로 사족의 반발을 사서
반란을 자초하는 결과가 될 것이니,사쓰마와 조슈,그리고 도사의 군사들
가운데서 정병을 선발하여 상비군으로 하는게 옳다고 역설했다.

사쓰마파는 오쿠보의 의견에 동조해서 며칠동안의 논쟁끝에 결국 급진론인
징병제가 폐기되고, 점진론인 오쿠보의 의견이 채택되었다.

개혁이란 당초의 생각과는 달리 의외로 어려운 과제였다. 징병제라는
한가지 문제로 며칠씩이나 밀고당기는 진통을 겪고도 잘 이루어지지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정국이 뒤숭숭한 가운데, 어느날 오무라는 고향으로부터 부친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았다. 아무리 국사가 다망하지만, 어쩌면 부친과의
영원한 이별이 될지도 모르는 터이어서 그는 말미를 얻어 고향인
조슈번의 야마구치를 향해 떠났다.

중도에 교토의 기야마치에 있는 여관에 묵고 있을때 오무라는 자객들의
습격을 받았다. 숙박객을 가장해서 여관에 들어선 자객들이 불시에
오무라의 방으로 뛰어들어 마구 대검을 휘둘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