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8월초 하기휴가차 설악산에 머무르고 있던 어느날 나는 라디오에서
충격적인 뉴스를 듣게 되었다. 박정희대통령이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선포했다는 것이었다.

그날은 8월3일이었다. 나는 나머지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부랴부랴 짐을
꾸렸다.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은 8월3일에 발동되었기 때문에
통상 "8.3조치"라고 불렀다.

이른바 "8.3조치"는 재정과 경제에 관한 대통령의 긴급 조치로서 당시
지하경제를 지배하던 사채의 동결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기업인들은
높은 금리부담에 시달리지 않을수 없었다.

정부는 이러한 사실을 중시하고 사채를 동결키로 하여 대통령 긴급명령을
발동한 것이었다. 나는 이 조치가 은행의 영업환경변화는 물론 기존의
제도권 금융전체에 일대 지각변동을 몰고올 것으로 전망하였다.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바와같이 이처럼 획기적인 조치가 취해지면 반드시
그 후속조치가 있게 마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업의 사채신고가 의무화
되었고 각종 법령이 정비되거나 새로 제정되었다.

이와관련 기존의 상호신용금고법에 이어 이듬해 2월17일에는 단기금융업법
과 신용협동조합법이 제정되었다. 이에따라 상호신용금고와 투자금융회사가
설립되기 시작하였고 사채시장의 지하자금은 서서히 제도권으로 흡수되기
시작하였다.

사실상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금융권의 정비와 개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종전에는 은행이 시중의 금융유토을 전담하였고 일부 사채시장의 지하자금이
산업으로 흘러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채시장이 설 자리를 잃게 되었으며 은행이외의 기관에서도
금융상품을 취급할수 있는 법적장치가 마련된 것이었다.

1973년1월중순 나는 새해인사와 섭외를 겸하여 한국개발연구원(KDI)의
김만제원장을 방문하였다. 김원장과 나는 "8.3조치"이후 금융시장의 움직임
과 우리나라 금융산업의 발전방향등에 대해서 폭넓은 의견을 교환하는등 여
러가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던중에 김원장은 나에게 금융인으로서의 경험을 살려 단자회사같은
금융업을 직접해보는것이 어떠냐는 권유를 하는 것이었다.

한담끝에 나온 이 권유는 내인생에 있어서 일대 분수령이 되었다.

나는 사람의 일생이 모두 운명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믿고있는 운명론자라고
말할수 있다. 동시에 나는 인연이라는 것을 잊지않고 있다.

내경우 파란만장한 칠십평생을 살아오면서 운명적인 일들을수없이 체험
하였고 인연에 의하여 영욕이 교차하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선은행 근무시절 백두진씨나 유창순씨를 만난것이 인연이라면 머나먼
중국 서주지점으로 가게되었던 것도 운명이었다.

해방후 귀국선을 타고 바다위에서 표류하다 극적으로 살아난 것이 운명
이라면 6.25때 정치보위부에 끌려다니던중에 동창생을 만날수 있었던것도
인연이었다.

그외에도 양조장 사업에서의 실패와 극장업에서의 성공등등 이모든 인생
역정을 거쳐나오는동안 나의인생은 우연이 아니라 운명과 인연에 의해
좌우된다고 믿게 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금융계에 청춘을 바쳐온 사람으로서 금융업에 손대보고 싶은 것은
당연지사가 아닐수 없었다.

시중은행의 지점장으로서 언감생심 꿈도 꾸기어려운 일이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내 가슴은 더 큰 사업에 대한 야망으로 식을줄 모르고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듣게 된 금융업에의 권유는 나 스스로도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였으며 내게 주어진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요컨대 김원장의 권유는 운명과 인연이 만들어준 좋은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