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소위 "현지소집"에 따라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나는 2개월간의
혹독한 훈련을 받던중 일제가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지옥같은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해방된 나라의 자유인으로서 나는 더이상 서주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었다.

때로는 기차를 타기도하고 때로는 걷기도 하면서 죽을 고비를 가까스로
넘긴 끝에 나는 꿈에도 그리던 서울에 도착하게 되었다.

서울에 도착한 나는 고향으로 직행하려던 계획을 바꿔 조선은행 본점에
들렀다. 나의 귀환이 알려지자 은행안은 떠들썩하였다. 조선은행은 미
군정청 휘하로 넘어가 있었는데 백두진씨가 업무부장을 맡고 있었다. 나는
광주지점에 근무할때 백두진씨를 대리로 모신바 있었다.

알다시피 백두진씨는 훗날 국무총리와 국회의장을 역임하는등 거목으로
활약하였다. 어쨌든 나는 백부장의 안내로 은행 중역들에게 그동안의 중국
생활에 관해 자세히 보고하게 되었다.

나는 신설된 인사부로 발령을 받았는데 인사부 창설요원으로는 유창순씨도
있었다. 그는 평양지점에서 근무하다가 본점으로 전보되어 인사부에 배치
되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유창순씨도 국무총리를 역임한바 있고 전경련 회장도
지낸 분인데, 이때의 인연으로 우리 대신그룹에서는 대신경제연구소 회장
으로 추대하였다.

한편 아버님은 중국에 아들을 보내놓고 애끓는 아픔을 겪으셨던 까닭인지
어느 사이엔가 병환이 깊어지시더니 해방된지 1년도 안되어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나는 실의와좌절감으로 방황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아버지는 나의 절대적인 후원자였고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나는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거상이 되겠다는 나의 희망은
버릴수가 없었다.

아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부터는 내 스스로 앞길을 열어가야 한다는
현실이 나로 하여금 더욱 강한 의지를 불태우게 했다.

그래서 더 많은 경험을 축적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앞으로 거상이 되려면
은행보다 더 활동적인 직장에서 일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런 생각들 하던 끝에 나는 그해 10월 조선은행을 사직하고 대한식량공사
로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그런데 대한식량공사는 1949년11월 농협으로
흡수.통합되었다.

정부기관에 들어가 견문을 넓히고자 기회를 찾고있던 나는 마침 임시
외자관리청(조달청 전신)에 자리가 나서 그쪽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외자관리청에 근무하면서 알게된 인물 가운데 현 세방그룹회장인
이의순씨가 있다. 지금도 이회장을 만나면 사업이야기는 물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 모른다.

해방정국은 극도로 혼란하였다. 좌우익의 갈등으로 이들간의 충돌이
끊이지 않았고, 치안상태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이같이 사회혼란이
극심해지는 가운데 1950년 6월25일 공산군은 불법 남침을 감행하였다.

전쟁발발 3일만에 수도 서울이 공산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해 7월
초순이었다. 나는 전시인 만큼 어머니와 가족들이 별고 없는지 알아보기
위해 잠시 고향집에 들르게 되었다. 다행히 가족들은 무사하였다.

그러나 나주는 그때 이미공산군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다. 전선은
삽시간에 무너져 버렸다. 이제 피란은 고사하고 피신할 겨를도 없었다.

우리 송촌리에서는 나주읍 부읍장이었던 김영호씨와 내가 소위 "반동분자"
로 몰려 "공민권"을 박탈당하게 되었고 이와함께 매일밤 10시에 나주
세무서를 점령하고 들어 앉은 정치보위부로 끌려가서 이른바 "자아비판"
이라는 것을 해야만 되었다.

그럴즈음, 실낱같은 희망이 손짓하는 일이 일어났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자아비판"을 하러 다니던 정치보위부에서 실로 우연히 대정국민학교
동기생 박아무개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정치보위부 간부에게 부탁하여
매일 되풀이하던 자아비판을 면하게 해주었다.

그 이튿날 나는 송촌리를 빠져나와 변장을 하고 돌아 다녔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터벅터벅 영산포다리를 절반쯤 건너고 있을때 어디선가
번개처럼 나타난 폭격기가 냅다 다리를 향해 폭탄을 떨어 뜨렸다.

두어 발짝 앞에 가던 사람이 현장에서 즉사하였고 다리에서는 거대한
불기둥이 솟아 올랐다. 나는 혼비 백산하여 다리밑으로 몸을 날렸다.

폭격기가 모습을 감출때까지 나는 꼼짝않고 숨어있었다. 나도 두어
발짝만 더 갔더라면 꼼짝없이 참화를 당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인명재천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9월28일 서울이 탈환되었다. 이를 계기로 광주에 국군과 경찰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도 마침내 저 길고도 지루했던 지옥의 늪에서 빠져
나올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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