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참으로 유수와 같다. 파란 동심으로 마음껏 뛰놀던 시절이 엊그제
같건만 어느새 고희를 맞이하였다.

돌이켜 보면 지나온 세월에 많은 영광과 시련이 있었다.

그 영광과 시련의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어느덧 칠십성상이 흘러간 것이다.

나는 일제하의 암흑 시대에 태어났다. 우리민족은 일제의 탄압을 받으며
만고풍상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나라 잃은 백성의 서러움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절대다수의 동포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국권회복을 얼마나 애타게
갈구했던가. 그래도 나는 다행히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배고픔을 모르고
자랐으며 적령기에 정상적인 교육도 받을수 있었다.

그후 사회에 나와 금융계에 첫발을 들여놓은 이래 오늘날까지 반백년 이상
금융계에 청춘을 다 바쳐왔다.

그동안 여러 난관들이 없지 않았다. 때로는 실의와 좌절속에서 괴로운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대신그룹을 창업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올해로 창립 32주년을 맞는 대신증권을 비롯 대신경제연구소(84년)
대신개발금융(86년) 대신정보통신(87년) 대신투자자문(88년) 대신생명보험
(89년) 대신인터내셔널 유럽(91년)등이 대신금융그룹의 계열사로 설립되어
알차게 성장해 가고 있다.

1990년에는 그동안 해왔던 사회공익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려고 대신
송촌문화재단을 설립하게 되었다.

그동안 여러 인사들의 도움이 있었다. 특히 오늘날의 대신그룹을 이룩하기
까지 모든 대신 가족들은 실로 땀과 눈물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우리 대신그룹은 세계제일의 종합금융그룹을 지향하며 총력을 경주
하고 있다. 전임직원이 혼연일체가 되어 최선을 다한다면 대신그룹은 멀지
않아 세계정상을 차지할수 있으리라 믿는다.

내가 오늘날과 같은 사업가로서의 큰 꿈을 갖게 된것은 목포상업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였다. 내가 상급학교를 진학할 당시에는 몇가지 코스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상업학교를 나와 곧장 취업을 하거나 고상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몇가지 방안을 놓고 다각적으로 모색한 끝에 나는 상업학교에
진학하는 방법을 선택하게 되었다. 나의 적성에 맞을 뿐만 아니라 아버님의
뜻과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당시 목포상업학교는 일본인 75명 한국인 75명을 뽑았는데 1천6백여명의
지원자가 몰려 한국인 지원자들은 무려 15대1이 넘는 치열한 경쟁을 치러야
했다. 목포상업학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명문학교여서 매년 각지에서
수재들이 몰려들던 시절이었다. 시험결과는 장담할수 없었다.

그렇지만 국민학교 재학시절 학교성적이 항상 상위권을 유지했던데다
밤새워 공부를 하며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비교적 안심할수는 있었다.

드디어 신입생 선발결과가 발표되었다. 신입생 합격자명단은 목포일보에
게재되는 한편 라디오 방송으로도 보도되었다. 나는 라주에서 간 25명의
응시자 가운데 유일하게 합격하였다. 부모님과 선생님은 말할것도 없고
근동이 떠들썩할 정도로 칭찬이 쏟아졌다. 그 치열한 경쟁의 문을 뚫고
당당히 합격을 했으니 자연 화제가 될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나는 나주읍내 누님댁에서 기거하며 목포까지
열차편으로 통학하였다. 당시 목포로 통학하는 학생은 약50여명이었다.
통학생들은 열차안에서도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통학생들중에는
우등생이 많았다. 특히 우리 한국인 통학생들은 모든 면에서 일본인
통학생들과의 경쟁심리가 강했다. 무엇이든 일본인에게 뒤져서는 안된다는
민족 정신이 우리들을 더욱 분발하게 하였고 그리하여 한국인 통학생들
중에는 우등생이 많이 나왔던 것이다.

어쨌든 목포상업학교에의 진학은 내인생 행로를 설정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나는 이때 비로소 앞으로 거상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대정국민학교 시절 수학여행차 화신백화점에 들러 막연하게나마 사업가가
되겠다는 청사진을 그려본 적이 있지만 목포상업학교에 다니는 동안 나는
인생의 진로를 분명하게 설정했던 것이다.

우리 목포상업학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말해주듯 숱한 인재들을 대거
배출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각계 각층에서 발군의 역량으로 눈부신 활동을
하고있다. 나는 이처럼 좋은 학교에 다닌것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힘이 닿는 범위에서 모교의 발전을 위해 무엇인가 뜻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던중 지난 1990년 모교에 아담한 과학관을 건립하였다. 이 과학관의
공식명칭은 대신송촌과학관으로 3층짜리 현대식 건물에 각종 과학 기자재가
구비돼 있다.

나는 거상의 꿈을 품게 해준 모교를 위하여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해야
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그것이 나를 가르쳐준 모교에 대한 보답이라고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