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니 뭐니해도 배고픈 슬픔이 가장 크다"는 속담이 있다.

굶주림은 종내에는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게 된다. 스스로의 삶이 끝나는
마당에 어떤 다른 슬픔이 앞서겠는가. 도덕과 명예, 가족과 사랑, 종교와
예술, 자유와 평등도 굶주림 앞에서는 한낱 허구에 불과할 뿐이다.

파블로 피카소도 한때 죽음직전의 굶주림을 경험했다. 어려서부터 동물을
좋아하던 그는 지독히 가난했던 시절에도 고양이를 기르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나 째지게 가난했던지 고양이마저도 먹을 양식을 스스로 마련해야 했을
정도였다.

언젠가 고양이가 한덩어리의 소시지를 집밖에서 물고 들어왔다. 굶주림에
지치다 못한 그는 염치를 불구하고 고양이와 더불어 그 소시지를 허겁지겁
나누어 먹었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피카소의 경우보다 더욱 비참하게 인간을 동물이하의
나락으로까지 격하시켜 버리는 굶주림의 단말마가 끊이지 않고 있다.

전세계 개발도상국 인구의 30%인 11억명가량이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최근의 세계은행추계
로는 그들이 하루에 1달러이하의 상계비로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 최빈국인 아프리카 모잠비크의 경우는 더욱 마음을 무겁게 한다.

1인당 국민소득 60달러로는 빈부의 격차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모든 사람
들이 굶어죽기 직전상태에 있다고 단언하더라도 지나친 속단은 아닐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 30,000달러대에서 20,000달러대를 구가하는 선진국들의
부유함에 비추어 본다면 지구문화시대의 어두운 그림자이자 참담한
모습이다.

동양의 음양사상을 빌리지 않더라도 세상의 모든 사상에는 음지와 양지,
어두움과 밝음이 양립하게 되어 있지만 가난과 굶주림의 지역적 편중현상
은 신의 은총 이전의 역사적 아이러니일수 밖에 없다.

가난한 나라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풍요와 영광의 시대가 있었던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거꿀로 부유한 선진국이라고해서 모든 국민이 달 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국민소득수준이 높아갈수록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고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는 소외계층이 생겨나게 된다. "풍요속의 빈곡계층"이다.

한국도 여기에서 예외일수는 없다. 사회의 저변에 1달러 이하의 하루살이
연명을 해 가는 계층이 없는지 관계당국은 물론 국민 모두가 관심을 갖고
보살펴야 할 때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