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막부의 해군 제독으로 함대사령관이었던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에도출신이었으며 스물한 살 때 나가사키에 있는 해군 전습소에 발을
들여놓았고, 이어 스물 일곱살 때에 막부 최초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행 열네사람과 함께 네덜란드로 유학을 갔다.

그곳 해군학교에서 사년반 동안 공부를 한 그는 막부가 그나라에 주문
했던 군함 가이요마루가 완성되자, 그 배에 몸을 싣고 귀국하였다.

네덜란드에서의 사년반 동안은 그에게 있어서 서양의 개화된 문명에
젖을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아닐수 없었다. 일본과는 사뭇 다른 정치를
그곳에서 목격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귀국할 때 여러 종류의 해군관계 병서와 함께 "해율전서"
라는 귀중한 책을 한권 가지고 돌아왔다. 네덜란드의 해사법전 즉 국제법
에 관한 책이었다. 그 한권의 책은 나중에 그의 운명을 밝은 쪽으로
돌려놓는 값진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는 귀국하자 곧 막부 해군의 제독이 되었고,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
받았다. 그러니까 그의 나이 서른두살에 막부 해군의 제이인자가 된
것이었다. 서열이 해군봉행인 가쓰야스요시의 바로 다음이었으니 말이다.

불과 육개월 뒤에 쇼군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을 선언했고, 그뒤 정국은
긴장의 소용돌이를 이루더니 마침내 전쟁이 터지고 말아, 에노모토도
함대를 이끌고 역사의 격동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막부군이 관군에게 밀려서 결국 사이고와 가쓰의 회담에 의하여 에도성이
무혈로 관군측에 인도되고, 막부가 문을 닫았을 때 에노모토는 에도
앞바다의 군함 속에 몸담고 있었는데, 그는 끝내 항복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다가 몇 개월뒤, 정확하게 말하면 팔월 일구일 해질녘에 기함
가이요마루 이하 여덟 척의 함대를 이끌고 에도 앞바다를 떠나 진로를
북쪽으로 잡았다.

오우에쓰열번동맹으로부터 관군을 격퇴하는 작전에 협조해 달라는 연락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가오카번은 패망하고, 아직 관군이 아이즈번
공략을 시작하기 전이었다.

중도에 심한 풍랑을 만나 군함 두척을 잃고,여섯 척을 이끌고서 에노모토
는 센다이번의 마쓰시마 앞바다에 이르렀다. 함대에는 수병들을 비롯해서
막부군의 패잔병과 살아서 도망쳐온 장의대 대원등 약 천오백명의 군사가
타고 있었다.

그리고 기함 가이요마루에는 이십삼만냥의 돈이 담긴 궤짝들이 실려
있었다. 오사카성에서 십팔만냥을 옮겨 실었고,에도에서도 비밀리에
오만냥을 막부의 금고에서 배로 옮기는데 성공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