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9년 신라의 현강왕이 동해바다에 놀러 나갔다가 짙은 안개를 만났다.
그때 동해용왕이 아들 일곱을 데리고 나타나 자신을 위해 절(사)을 세워준
것을 찬양하며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일곱 아들 중에서 처용은
왕을 따라와 정사를 보좌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 설화는 우리귀에 익은 이야기다.

60년대말에 지금은 고인이 된 사학자 이용범교수는 "처용설화"를 새롭게
해석한 논문 한편을 학계에 발표했다. 처용은 기록에 표현된 용보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아라비아상인중 한 사람이었고 당시의 동경(경주)은
세계 각국의 상인들이 드나들며 흥청거리던 동양의 국제무역항이었다는
기상천외의 발상에서 나온 논문이었다.

역시 고인이 된 고고학자 김원용교수도 경주에서 출토된 페르시아양식의
유물을 예로 들며 충분히 그럴수도 있다는 논평을 해 주목을 끌었다.

물론 이 사실이 학술적으로 공인된 것은 아니지만 당시 신라의 문화 수준
으로 보아 동경(경주)이 국제무역항이라는 것을 부정할 근거도 없다.

우물속 같은 작은 땅덩어리 위에 살던 신라인들은 해외로 진출하기 시작
했다. 장보고나 혜초가 그런 사람들이다. "삼국사기"에도 이런 기록은 셀
수없이 많다. 신라인들은 이처럼 높은 기상을 갖고 넓은 세계를 동경했다.

그런데 조선조에 들어오면 우리는 나라의 문호를 철저하게 닫아버리는
쇄국정책을 고수한다. 학자들은 그것을 외침때문이었다고 보고있다. 삼국
시대부터 조선조까지 우리는 무려 931차례나 침략을 받았다는 조사결과도
나와있다.

개화기초부터 무분별하게 서구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나 35년동안의
일제 강점기 6.25전쟁,군사독재시기를 보내는 동안 우리의 의식은 한층더
페쇄적 자조적으로 굳어져 버렸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그와중에서 우리는 농촌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엄청난 변화를
겪으면서 지금은 국제화 세계화를 외치는 열띈 분위기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최근 KDI부설 국민경제연구원이 조사한 결과 국내인들은 우리기업의 해외
진출에 대해서는 80.5%가 찬성하고 있지만 외국기업의 국내진출은 45%만
찬성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또 에리트 커뮤니케이션이 실시한 국내 외국
기업인 여론조사에서는 외국인을 차별대우하는 행정규제가 심하고 한국인의
외국인을 적대시한다는 응답이 47.1%나 됐다고 한다.

세계화 국제화의 당위성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들의 의식속에는 아직
"소중화" "동방예의지국"이라는 권위주의에만 머물러 있는 것인지,
답답한 마음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