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의 월남 진출은 국내기업으로서는 최초의 해외용역사업이었다.
국제화의 선두주자라는 점과 함께 작전상 필요에 의해 군수물자
수송에 기여한다는 것 자체가 큰 보람의 하나였다.

폭우가 쏟아지면 길이 보이지 않았다. 우기에는 파도가 높아 하역
작업을 제대로 할수없었다. 언제 있을지 모를 베트콩의 기습은 항상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며 한진은
해냈고 미군들도 더 큰 규모의 후속계약으로 깊은 신뢰감을 나타냈다.

1967년 5월 2차 계약에서는 1차계약의 5배에 달하는 3천4백만달러로
사업규모가 늘어난 것이다. 71년 군철수와 함께 용역사업을 마무리
할때까지 약5년동안에 걸쳐 한진이 월남에서 획득한 외화는 총1억5천만
달러 규모였다.

이 기간중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1백25달러 내지 3백달러
정도의 수준이었음을 감안해보면 그것은 엄청난 거액이었다. 특히
일반제품의 수출이 아닌 용역사업이니, 국가적으로 볼때도 외화
가득률이 높아 그 의의가 적지 않았다.

이같은 외화획득이 당시 우리경제발전에 적잖은 기여를 한것도 사실
이었다. 정부에서는 외화획득 우수업체로 한진을 선정해 매년 수출의
날 대통령표창 은탑산업훈장 금탑산업훈장 대통령우승기 등을 포상했다.
한진은 당시 기업체중에서 최고상 최다수상을 기록했다.

그러나 금전적인 수입이나 훈장보다 더 값진 소득은 어려운 일에
도전해 성공을 거둔데 따르는 자신감과 성취감이었다. 이것은 다른
무엇으로도 바꿀수 없는 인생 최대의 보람이기도 했다.

또한 이 자신감이야말로 한진이 월남사업이후 종합수송 기업집단으로
성장해 오면서 어려울때마다 이를 극복하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준
것이었다.

아무리 좋은 기회라 하더라도 이를 포착하고 실천에 옮기는 결단이
없으면 발전이란 있을수 없다는 교훈도 거듭 확인하게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월남에 진출해 큰 성공을 거두기까지 여러 사람의 노고와 지원이
있었다. 동생 중건(현 대한항공 부회장)의 보좌는 물론이려니와 평소
교분을 쌓았던 국내외 인사들의 도움도 잊을수 없다.

성실과 신의를 바탕으로 한 인간적인 유대라는 뒷받침이 있었기에
사업 관계에서도 상대가 어려운 처지에 있을때는 이해관계에 급급하지
않고 흔쾌히 도와줄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적인 유대관계와 관련해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월남전에서 임무를 마친 한 미군 장성의 이취임식이 일본에 있는
미군비행장에서 열리게 되었다. 초대을 받고 가던 중 그만 비행기가
연착해 행사시간전에 대지 못하게 되었다.

황망한 가운데 뒤늦게 행사장에 도착해보니 나의 참석을 기다리기
위해 장군은 행사를 중지시킨 채 많은 사람들을 대기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행사장에 모습을 보이자 장군은 "하이! 보스"라고 반갑게 인사하며
그제서야 행사를 재개했던 것이다.

나와 장군이 지금까지도 서로의 오랜 교분을 이어오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진의 사업이 국제화되어 가면서 기업가로서의 나의 이름이 해외에도
어느 정도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민간외교 차원에서 국가에
봉사하는 기회도 주어졌다.

한일국교정상화전인 64년 7월 초순 당시 요직에 있던 장기영씨의 요청
으로 일본으로부터 2천만달러의 협력기금을 얻어 온 일은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다. 69년에는 다시 정부의 요청으로 일본에서 쌀60만 을 반입해
오는 일 등에도 나서게 되었다.

월남 사업에서의 경험과 용기, 그리고 축적된 자금을 바탕으로
한진은 계열 회사를 거느린 기업진 집단으로 서서히 발전해갔다.
우리나라 대부분 기업들이 성장기반을 국내에 두고 있는데 비해
한진은 해외에서 거둔 성공을 바탕으로 한 특별한 성장과정을 지닌
기업으로 부각되었다.
또한 이 모든 성과가 대한항공 성장 발전의 기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