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이 40중반을 넘어서면서 인생을 동호동락 할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이며 기쁨인지 새삼 되돌아 보아진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대학을 다니고 이곳에
정착하게 되면서 고향의 동문들과 사회친구들과 좋은 벗들을 함께하는
많은 모임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그 뿌리가 깊고 오랜동안 우의를
다져온 모임이 하나 있다.

광주학생운동의 발원지인 학생탑 아래서, 대학캠퍼스에서, 도서관에서,
명륜동의 석굴암대포집에서 막걸리로 다져진 우정이 철이들고 사회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 하나둘 장가를 들고 집들이도 하고 아이들 돌잔치도
하게 되면서부터 친구들끼리 십시일반하여 선물꾸러미를 들고 다니던
것을 누가 정례화 하자는 주장도 없었건만 자주 그리고 주기적으로
자리를 함께 하고 애경사에는 한마음이 되어 주면서 공식적인 모임으로
발전하여 모임의 규약도 만들고 이제는 제법 기금도 몇푼 모아두고
서울근교에 아담한 콘도도 마련하게 되었다.

모임의 이름도 광주일고 11회 졸업에, 성균관대학교를 함께 다닌
앞자를 따고 한마음으로 오래 오래 동호동락하며 한번쯤은 큰뜻을
이루어보자고 "일성회"라 명명하였다.

우리들 모임 모두에게는 인생의 조우명이자 가훈이 하나 있다.
모임 친구중 증권감독원에 근무하다 미국엘 잠시 유학을 가 있는
김영재군의 모친께서 서예의 대가이시어 우리 모두에게 "항상희락"
이라는 어머님의 깊은 뜻을 글로 써 주셨다. 액자를 똑같이 만들어
회원 모두의 집에 걸어두고 우리의 삶을 가정의 평화와 건강을 위하여
항상 즐겁고 기쁨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하고 이를 좌우명과 가훈
으로 삼고있다.

이제 모임이 태동되기 20여년. 처음에는 우리끼리의 모임에서 부부
동반 으로 발전하더니 아이들이 크게 되면서 아이들 중심으로 철철이
자리를 함께 하였으나 어느새 아이들이 다 컸다고 함께 모임에 나가자면
대부분 "No"라고 하니 이제 삶의 한 싸이클이 지나 또다시 부부중심으로
회구하게 된것 같아.

지나간 에피소드 하나를 들면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아 총각친구까지를
포함해서 주문진 해수욕장으로 여름휴가를 떠나 민박을 한 일이 있었다.
새벽녁에 이방 저방에서 아우성이 들려 깜짝 놀라 잠을 깨어보니 글
집에 민박든 다른팀까지 모두의 옷가지와 보따리를 몽땅 털어가고,
입고 잔 속옷만 남게 되는 황당한 도난사건이 발생했다. 그 와중에도
항상 유모와 기지가 넘치는 친구 왈, 팔목에 찬 시계를 높이 쳐들더니
큰 소리로 웃으며 "이것도 쓸만한데 바보같이 안가져 갔어!"하면서
여유자적해 좌중을 웃기는 일이 있었다. 물론 한참뒤 들판에 버려둔
옷은 찾긴 했지만 정말 그때가 엊그제의 일만 같다.

우리모임의 일원은 앞서 얘기한 김영재군과 삼성전자의 이영섭부장,
국민은행의 임건상 지점자, (주)금강의 곽열차장, 사업을 하고 있는
손상선.신덕균 신재호군과 교직에 있다. 뜻한 바 있어 농장을 하고
있는 최운주군 등이다.

이제 30여년간 서로의 애환을 유리알처럼 알고 지내다 보니 친밀한
동호동락을 넘어 고운정 미운정이 듬뿍들게 되었다.
각자가 전혀 다른 분야에서 제작기의 바쁜 삶을 영위하면서도 이어져온
정들이 더욱더 끈끈하게 계속되어 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