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초는 특히 우리나라로서는 격동의 시기였다. 불혹의 나이인
마흔을 막 넘어섰으나 정치와 경제 사회가 요동을 치니 늘 살얼음판을
걷는 불안속에서 사업을 벌여나가야만 했다.

60년의 4.19학생의거,국부로까지 추앙받던 이승만대통령하야,이듬해 다시
군사혁명 매일 아침 눈을뜨면 세상이 바뀌어있을 만큼 어수선하니 경제활동
이 원활할리 없었다.

63년12월에는 제3공화국이 탄생했다. 군복을 벗고 민간인 복장을 한
박정희장군이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군정에서 민정으로의 변화였다.
뭔가 좀 안정이 돼가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새 공화국이 탄생됐다해서 경제문제가 하루 아침에 개선될리는
없었다.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은 61년말 2억달러에서 63년말에는 1억3천만
달러로 감소돼 있었다. 반년이 채못돼 새 정부초대내각이 총사퇴하고
64년5월 정일권내각과 함께 장기영 한국일보 사주가 최초 부총리 겸 경제
기획원 장관으로 입각했다.

백상 장기영씨에 대한 일화도 참 많았다. 언젠가 신문지에 벌겋게 무슨
표시를 하길래,"그게 무엇입니까"하고 물어봤더니 "신문에 에러가 나면
이렇게 피를 흘리게 됩니다"하고 웃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부총리 재직시에도 신문에 애착이 많았던 정력가였다.

취임한지 몇개월 지난 장기영 부총리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심각한
외환위기 극복에 필요한 2천만달러를 일본에서 변통해오는 사절로 나서 달라
는 것이었다. 64년 우리나라 가용외화가 4천7백만달러에 불과하던 시절
2천만달러는 큰 금액이었다.

정부에서 나를 지목한데에는 물론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본이나
한국에 주둔하던 미군 장성들을 통해서 알게 된 일본의 기업인들이 정계나
관계에 실력자들과 줄이 닿아있기 때문이었다.

그중의 한사람이 당시 일본의 대장상이었던 다나카 가쿠에이대신 다나카씨
는 당시 차기총리를 노리고 있던 민자당의 막강한 실력자이기도 했다.

그와 친하게 된것은 평소 교분이 두텁던 일본인 기업가인 오사노겐지씨의
소개를 받아서였다. 나를 포함한 세사람 모두가 무학을 벗어난 정도의
보잘것 없는 학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상통되는게 있어선지 서로가 퍽 친근감
을 갖고 있었다.

오사노씨는 나보다 두살위였고 다나카씨는 한살위로 동년배나 다름없는
처지였다. 나는 먼저부터 알던 오사노씨 보다도 그를 통해 알게된
다나카씨와 오히려 더 가까웠다. 다나카씨는 내게 일제시 한국에도
있었다고 얘기한 기억이 난다.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국내 여론이 들끓고 있었는데다 정상적인 절차를
통한 대일차관이 가능한 시점이 아니어서 주저되기는 했으나 나라형편을
생각한 정부의 요청을 나 몰라라 할수는 없었다.

몇가지 협의를 한뒤 일본으로 건너갔다. 다나카씨를 만나기 전에 밤을
지새며 궁리를 거듭했다. 짧은 시간내에 단 몇마다의 말로 일을 성사
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말이 좋을까 하는 연구를 한것이다.

결국 설득끝에 2천만달러의 협력기금 차관이 성사됐다.

관만이 아니라 민간차원으로서의 뒷받침도 훌륭한 외교가 될수있다는 것을
처음 실감한 셈이었다. 뿐만아니라 관의 공식적인 외교와 민간차원의 외교
가 때때로는 불가분의 관계로 발전할수 있음을 알게 됐다.

우리나라 경제재건의 원동력이 된 1차경제개발5개년계획 성패의
갈림길에서 나의 조그마한 힘도 보태졌다는 사실이 퍽 대견스럽게까지
생각됐다.

이때부터 나는 기업이 꼭 자체의 사업과 이익을 통해 국가사회에
기여하는것 말고도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국익에 도움이 될수있는 길이
한두가지가 아님을 깨닫고 더욱 마음가짐을 가다듬었다.

일본방문의 수확은 그것만이 아니라 사업의 활로를 해외로 돌리는데
관심을 갖는 계기도 됐다. 특히 국내에서는 미처 몰랐던 월남전양상에
대한 새로운 정보들을 접할수 있었다. 장기영씨도 내게 월남에 관심을
갖도록 권유를 해 2년뒤 월남진출로 이어지는 서막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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