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년 9월24일에는 IMF.IBRD연차총회가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개최되었다.
한국에서는 남덕우재무장관 금성환총재 이재설경제기획원차관 이희일씨
(동자부장관역임) 김원기산업은행총재 김우근외환은행장 신병현IBRD대리
이사 계봉혁ADB이사 이승윤서강대교수 정인용씨(부총리역임) 홍재형씨
(현재무장관) 등이 참석했는데 나도 대표단의 일원으로 아프리카를
방문했다.

당시 케냐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신생국으로 켄야타대통령이 총회에
참석한 1백25개국 대표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북과 창을들고 마사이족 민속춤을 추면서 회의장에 입장하는 각국대표
들을 환영하는 광경이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회의가 열리면서 각국대표가 연설을 시작했는데 이스라엘대표가 연설할
때는 아랍국대표들이 총퇴장했다.
또 남아프리카대표가 연설할때도 아프리카대표들이 모두 퇴장하는
소동이 연출되었다.

나이로비 북부의 마사이족은 그때도 여전히 문명세계와 동떨어진
원시생활을 하고있는 것을 보고 아프리카제국은 경제발전을 논하기전에
교육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선진국학자들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했다.

나이로비를 한발짝 벗어나면 야생동물들의 낙원인 광활한 평야의
국립공원 사파리로 연결되는데 우리나라 대표단도 회의가 끝나고 이곳을
방문했다.
각종 동물들이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동물의 세계를 내눈으로 직접 볼수 있는 기회였다.

인접국인 우간다에선 아민이 연일 대국민테러를 일삼고 있다는 비난이
각국대표연설에서도 나왔다.
나는 나이로비에서 우연히 양말을 팔기위해 왔다는 우리나라의 젊은
세일즈맨을 만났다. 회사이름도 잘알려지지 않은 중소양말공장직원이
아프리카 각국을 누비면서 세일즈하는 모습에 감탄했다.
돈만 벌수있다면 불에라도 뛰어드는 기업가 정신이 61년에 4천만달러에
불과하던 수출을 73년에는 70배가 넘는 30억달러로 끌어 올린 원동력
이라는 믿음을 확인하는 계기였다.

한국의 수출증가와 그때문에 이룩한 10%대의 고도경제성장으로 연차
총회에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다는 것을 감지할수 있었다.
그해 10월부터 시작된 중동전쟁은 17일만에 휴전으로 끝났지만
전세계를 뒤흔든 석유파동으로 "자원의 무기화"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우리나라는 석유값의 폭등보다도 금수에조치에 따른 석유물량확보가 더큰
골치꺼리였다.

72년가을부터 시작된 전세계적 자원값폭등 때문에 석유를 포함한 모든
자원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그대책을 강구하지 않을수
없었다.
73년7월 장기자원대책위원회가 경제과학심의회위원들을 중심으로
발족했는데 그기구가 분과위로 개편되면서 나는 자원정보분과위원장을
맡게됐다.

정보분과위원회에서는 송인상위원장의 요청에 따라 우선 자연자원
매장량과 생산에 관한 전세계적 자료를 만들고 그것을 근거로 자원
지도를 작성했다.
또 지금의 종합청사 18층에 자원에 관한 상황실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나는 이상근씨를 중심으로한 유능한 조사부직원을 동원 자원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상황실을 마련했다.
상황실이 설치되자 송위원장이 김종필총리를 모시고왔다. 내가 브리핑
봉을 들고 차트를 짚어 가며 열심히 브리핑을 하자 김총리는 만족해
하시는 모습을 보였다.

그때부터 김종필총리를 모실수있는 계기가 된것이다. 김총리는 경제
장관들은 우측에, 장기자원대책위원장들은 좌측에 앉히고 자원대책
회의를 자주 가졌다. 나는 한국은행이사였지만 분과위원장이라는
직책을 맡았기 때문에 그회의에서 장관들과 마주앉게 되었다.

그후 송인상위원장은 주벨기에 대사로 떠나고 송방용위원장이
자원대책위원회를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