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슬아슬하게 저격을 모면한 가쓰는 자기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에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그는 사이고와 약속한대로 막부의 막을
내리는 작업을 차근차근 어김없이 시행해 나갔다.

제2조와 제5조에 규정한대로 일개월 이내에 성안에 거주하는 도쿠가와
가신들을 전원 무코지마라는 섬으로 이주시키고,에도성을 비워서 동정군
에게 넘겨 주었다. 그날이 1868년 4월11일 이었다.

도쿠가와이에야스가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어 에도에 막부를 설치한 것이
1603년이니까,정확히 이백육십오년만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페리 제독이
네 척의 흑선을 이끌고 에도의 우라가 앞바다에 나타나 개국 통상을 요구한
것이 1853년이었으니,그로부터 십오년만의 일이었다. 꼬박 십오년 동안의
격동을 거쳐서 마침내 이백육십오년 동안 철권통치를 일삼아온 무인 정권인
에도막부는 무너지고만 것이었다.

에도성을 인도받아 동정군이 입성하던 그날,우에노의 간에이지에 은거
근신을 하고있던 요시노부는 제1조에 규정된대로 그곳에서 나와 고향땅인
미도번을 향해 떠났다.

제3조와 제4조에 규정한 병기와 군함의 인도 문제는 일단 전부 넘겨받은
다음에 도쿠가와 가문의 존속이 결정되면 그때 가서 그에 합당한 분량을
다시 내주기로 변경이 되었었다. 그동안에 사이고가 교토로 가서 유신
정부의 중신들과 칠개 조항에 대하여 의논을 했었는데,3조와 4조만 그렇게
수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쓰는 그날 성의 인도와 함께 병기와 군함을 일단 전부 동정군
측에 넘겨 주었다. 군함은 모두 여덟 척이었다. 그런데 그날밤에 그 가운데
두 척이 탈주를 감행해 버렸다. 해군뿐 아니라 육군에서도 부대를 벗어나
도망을 치는 군졸들이 적지 않았다.

어떤 부대는 전원이 집단 탈영을 해버리기도 하였다. 스스로 무장 해제를
하여 병기를 모조리 넘기고,마치 포로와 다를바 없는 처지에 이르자,분노를
삭일 길이 없었던 것이다.

거대한 공룡과도 같은 막부가 쓰러지는 판국이니,어수선할 수밖에 없었다.

그무렵 에도의 아사쿠사에 있는 혼간지(본원사)라는 절을 본거지로 한
일단의 사무라이 결사가 있었다. 창의대라는 이름의 집단이었다.

요시노부가 쇼군직에 오르기 전 히도쓰바시가의 가주로 있을 당시 심복
이었던 시바사와세이이치로와 검객으로 이름난 아마노하치로가 조직한 것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