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석 신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의 경제철학은 80년 상공부장관을
마지막으로 관직을 떠난뒤 쓴 "세계속의 한국경제"라는 책속에 잘 나타나
있다.

이책에서 정부총리는 "우리가 빈곤을 타파하고 국부를 누리는 길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거두는 일밖에 없으니 경제를 최대한 키워서 "수출주도하의
공업입국건설"을 서두를 수 밖에 없었다"면서 자신을 "항상 "창업활동"에
평생 매달려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얼핏보면 성장론자 같은 이미지를
풍긴다.

정부총리는 3공시절 줄곧 성장론을 펴왔다. 또 경제기획원 기획국장 차관
등을 역임하면서 이를 강력하게 실천에 옮겼지만 그렇다고 그를 단순히
성장론자라고 얘기하기는 어렵다는게 주변의 평이다.

국제경제연구원장시절인 77년,사상처음으로 경상수지가 2천-3천달러의
흑자를 기록했을때는 "기조전환기의 경제정책"이란 보고서를 발표해 수입
개방폭을 넓히는 등(수입자유화 확대) 안정화 시책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같은 주장은 바로 다음해인 78년 경상수지가 다시 적자로 돌아섬에따라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당시 국제경제연구원에서 함께 일했던 학자들로서는
정부총리가 성장론자보다는 오히려 안정론자로까지 비춰지기도 했다.

당시 국제경제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던 윤식산업연구원북한실장같은
이는 그래서 "정부총리를 성장론자나 안정론자로 구분하기보다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유연한 정책을 구사할줄 아는 사람"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정부총리는 미국 벤더빌트대학원(경제학석사),세계은행 경제개발연구원
과정,하버드 경영대학원 수료,일본 게이오대 초청 연구생활등의 경력에서
볼 수 있듯이 국제적인 감각에도 밝다는 평.

77년 설립한 국제경제연구원이란 이름도 스스로 작명했을 정도다.

"나는 사범대학을 나와 학문과 교육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으며 관료
보다는 학자라는 평을 더 좋아한다"는 정부총리는 지난 10월 교통부장관
취임때 "나는 이코노미스트"라고 할 정도로 효율을 중시여기는 스타일.

한국외국어대학원에서 효율을 중시하는 "조직론"과 "전략론"을 강의했다.
때문에 사람들은 정부총리가 앞으로의 경제운용을 경제효율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제도개혁등을 해나갈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정부총리의 결단력과 추진력은 타고났다는게 주변의 얘기. 기획원기획국장
시절이나 차관시절 "해야한다"고 생각하면 가능성이 조금만있어도 밀어붙여
일을 성취해냈다고 한다.

75년 중동문제연구소(현산업연구원)설립 임무를 맡았을때도 매일 밤늦게
까지 일을해 일의 추진력에선 그누구에도 뒤떨어지지않아 같이 일했던 사람
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 주요 발언록 <<

"헌법기관을 어떻게 대통령령으로 개폐하느냐"(80년 5.17이후 신군부가
국보위 설치령을 국무회의에 올렸을 때)

"우리가 빈곤을 타파하고 국부를 누리는 길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거두는
일밖에 없으니 경제를 최대한 키워서 수출주도하의 공업입국건설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80년 저서 "세계속의 한국경제")

"나는 사범학교 출신으로 학문과 교육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으며 관료
보다는 학자라는 평을 더 좋아한다"(93.10월 교통부장관 취임때)

"나는 이코노미스트다"(93.10월 교통부장관 취임때)

"한국경제의 황금기에 경제부처의 핵심요직을 거친 사람이 재산이 별로
없다면 믿어줄지"(93년 10월 교통부장관 취임때)

"(교통시설에 대한 투자를)누군가는 반드시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수송장애가 수출의 발목을 잡고 경제침체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도 효율적인 생산교통을 실현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93.10월
교통부장관 취임 인터뷰)

"국회답변때 장관이 아래 실무자들이 적어준 종이쪽지나 들고 눈치를
살피며 얼버무려서야 되겠느냐. 의원들의 힐책을 받아들인땐 겸허하게,또
받아들일 수 없을 땐 단호하게 "노"라고 답변해야 한다. "(93년 교통부장관
취임후)

"길도 막히는데 교통부 직원이 모두 (국정감사에 참석하기 위해)차를 끌고
오면 어떻게 하나. 각과에서 한 두명씩만 남고 모두 돌아가세요. (93년10월
국정감사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