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고 호젓한 내실에 한 여인이 앉아서 붓글씨를 쓰고 있었다. 서른이
갓 넘어 보이는 여인은 살결이 유난히 희고, 머리는 칠흑같이 검었다.
덴쇼인(천장원)이었다.

십삼대 쇼군 도쿠가와이에사다(덕천가정)의 미망인인 그녀는 서예가
낙이었다. 그날 오후도 혼자서 조용히 붓글씨를 쓰고 있는데, 시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마님, 대감어른께서 마님께 인사를 드리러 오셨습니다" "대감어른이라니,
누구?" 붓을 멈추며 덴쇼인은 시녀를 바라보았다.

"쇼군 각하 말입니다" "뭐, 쇼군께서?" "예" "어서 들어오시라고 여쭈워"
덴쇼인은 붓을 놓았다. 그리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다음 자리에 정좌를
하고 앉았다.

정장을 한 요시노부가 조용히 들어섰다.

"대모님, 오래간만에 뵙겠습니다" "아이고, 어서 오시구려. 정말 오래
간만이오" 요시노부는 덴쇼인 앞에 큰절을 했고, 그녀도 앉은 채 머리를
숙여 정중히 답례를 했다.

"오늘 아침나절에 돌아왔습니다" "예, 알고 있었소. 자, 편히 앉아요.
차를 드릴까요, 술을 가져올까요?" "술을 한잔 오래간만에 같이 하고
싶군요" "좋아요. 그러자구요" 덴쇼인은 시녀에게 술상을 차려오도록
일렀다.

덴쇼인과 요시노부는 서른두 살로 동갑이었다. 그러나 덴쇼인은 십삼대
쇼군의 미망인이고, 요시노부는 십오대 쇼군이기 때문에 비록 직접 피가
이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조모뻘이었고, 손자뻘이었다.

의조모(의조모)인 덴쇼인과 의손자인 요시노부는 서로 좋아했다.
동갑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래서보다도 덴쇼인의 아버지와 요시노부의
아버지가 절친한 사이였던 것이다.

덴쇼인의 아버지는 사쓰마번의 명군이었던 시마즈나리아키라였다.
사이고다카모리가 순사(순사)를 하려고까지 생각했던 그 번주 말이다.
그리고 요시노부의 아버지는 미도번의 번주 두쿠가와나리아키였다.
육혈포를 선물함으로써 이이나오스케의 암살을 묵시적으로 지시했던 그
다이묘 말이다. 두 사람은 존황사상에 투철했기 때문에 서로가 존경하고
아끼는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

선친의 그런 관계 때문에 덴쇼인과 요시노부는 서로 남다른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