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시심 불시물 불시불 시십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니 이것이 무엇인고)
성철큰스님은 이 화두의 뜻을 알면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된다고 늘 말했다.
선과 교의 중도사상에 그중심을 두고서 우리나라 선종사상과 선문이 나아갈
길을 밝힌 성철스님이 4일 입적했다. 입적을 지켜본 원택총무스님은
올가을들어 성철스님이 "이제 가야할 때가 됐다"고 말해왔으며 이날 아침
조용히 눈을 감았다고 전했다.

"가야산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들을만큼 1백80cm 가 넘는 훤칠한 키에
섬뜩할 정도의 형형한 눈빛으로 뭇중생들의 마음속을 훤히 드러다보는
것같은 풍채를 자랑했던 성철스님은 해인사 백련암에서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채 초인적인 수행생활을 계속해왔다. 10년간 앉은채 잠을 자고 입도
열지않았다는 "장좌불와"수행은 그의 선행의 경지를 보여주는 사례중의
하나. 속명이 이영주인 성철스님은 1912년 경남 산청에서 대대로 진사를
지낸 명문가 장남으로 태어났다. 진주중학을 졸업한뒤 23세때인 1935년
하동산스님의 인도로 불가에 입문한 이후 백련암에서 수도하다가 38년 3월
설봉스님아래서 마침내 득도했다.

독학으로 불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익혔으며 영.독.불.일.중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하고 물리학과 심리학등 현대학문도 두루 섭렵했다. 속가에
있을때 딸을 하나 두었는데 그도 비구니로 출가,줄곧 성철스님을 가까이서
모셔왔다.

68년 해인사 초대방장에 취임한뒤 81년 조계종6대종정,91년 7대종정등으로
추대됐으나 취임식에 참가하지 않은 것도 길이 남을 일화. 특히 그를
만나기위해서는 절을 3천배해야 됐는데 서돈각 전동국대총장도 3천배를
한뒤 잠깐 만났을 정도로 아무나 만나기를 꺼렸다. 지병인 심장마비로
지난 4월부터 해인사 금강굴에서 요양해오고있다가 열반하기전 마지막으로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속에서/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도다. /둥근 수레바퀴
붉음을 내뱉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생평기광남녀군 미천죄업과수미
활염아비한만단 일륜토홍괘벽산)라는 내용의 열반송을 남겼다.

<오춘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