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솔 최현배(1894~1970)는 구한말인 고종31년에 경남 울산에서 최병수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

최현배는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뒤 고향의 일신학교에서 신식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1910년에 상경하여 한성고등학교(후에 경성고등보통학교로
개칭)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해에 나라를 잃게되고 모든 교과내용이
바뀌며 학교운영이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게 되자 재학중 3년간 주시경의
조선어강습원에 다니면서 우리 말글 연구에 큰 포부를 갖게 되었고
우리말과 글로 교육하는 것이 우리 겨레의 장래 소망이라는 신념을 굳히게
되었다.

문화체육부가 10월의 문화인물로 외솔을 선정한 것은 한글날과 연계하여
한글진흥에 힘쓴 그의 생애와 업적을 오늘에 되새겨 우리말과 글의
소중함을 새롭게 인식하고 우리말글을 올바르게 사용하며 보다 아름답게
가꾸는 "우리 말글 사랑하기 운동"을 전개하는 계기로 삼기 위해서이다.

최현배는 1915년에 졸업한후,일본 히로시마(광도)고등사범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19년에 졸업했고 중등학교 교원 자격증을 받았으나
관공립고등보통학교 교원을 칭병 사퇴하고 조선인의 상권확보를 위해
공동상회를 설립했다.

외솔은 22년에 교토(경도)제국대학 문학부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여
"페스탈로치의 교육학설"이란 논문으로 졸업했고 대학원에서 수학한뒤 26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했다. 그러나 38년9월 "흥업구락부사건"으로
강제사직당했다. 실직중 한글연구의 완성을 위해 "한글갈"(정음학)을
발간하였고 조선어학회 창립,조선어사전편찬준비위,그리고 "한글
맞춤법통일안"제정등에 참여하는등 한글운동에 전념했다.

최현배는 41년 연희전문학교 도서관직원으로 복직했으나 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광복때까지 3년간 옥중생활을 겪었다. 광복후
미군정청 편수국장에 취임하여 교과서행정을 담당하여 그 기틀을 잡았으며
54년 연희대학교 교수로 취임했다.

외솔은 "한글 가로글씨 독본"(68년) "한글만 쓰기의 주장"(70년)등
단행본을 발간하여 한글전용과 가로쓰기,풀어쓰기의 이론을 발표하여 찬반
양론을 불러일으켰으나 점차 한글가로쓰기와 전용은 현실적으로
정착되어가고 있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