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경제개발을 위한 계획적 노력이 최초로 시도된 것은 1953년
작성된 "타스카3개년 대한원조계획"이다. 이것은 당시 미국대통령이
타스카박사를 우리나라에 특사로 보내 경제실태를 파악하고 부흥사업에
필요한 경제원조액을 포함한 종합적인 전후복구방안을 검토케 함으로써
작성되었다.

미국정부는 이 보고서를 토대로 그해 2억달러의 특별원조를 제공하고
경제조정관실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이 한국에 원조를
제공할때 기초로 삼기위한 보고서였지 종합적인 경제개발계획은 아니었다.

이보다 좀더 종합적인 계획의 성격을 띤것이 53년 작성된
"한국경제재건계획"이라는 "네이산 보고서"이다. 이는 유엔한국부흥단이
전후 한국경제부흥을 위해 미국의 "네이산 연구소"에 요청,작성한 것인데
53~57년까지의 5개년부흥계획으로 되어있다. 이계획은 우리나라가 농업을
중심으로 자립할것을 권고하는 내용이어서 우리정부는 이를 채택하지
않았다.

우리정부가 장기개발계획을 최초로 시도한것은 58년 부흥부산하에
산업개발위원회(EDC)를 설치하고서 부터였다. 당시 부흥부의 송인상 장관을
중심으로 차균희 기획국장(농림부장관역임) 이기홍 기획과장(기획원차관보
역임) 정재석 사무관(상공부장관 역임)등 몇몇 부흥부관료들이 우리의
공업화를 위한 장기경제개발계획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추진할 기구
설치를 구상하였다.

송장관이 미국에가서 원조자금의 일부를 이 기구운용에 사용하는데 동의를
얻음으로써 EDC가 설립되었다. EDC의 위원장은 송장관이 맡았고
위원회에는 후에 건설부장관을 지낸 주원씨 농림부장관을 지낸
박동묘씨외에도 안림 홍성 황병준 김성범교수 이면석씨 김립삼씨등을
비롯한 많은 교수와 이코노미스트들이 참여 했다.

후에 농림부차관을 역임한 김종대씨는 사무국책임을 맡고 있었다.
고문역으로는 미국의 오리건대학에서 부문별로 5명의 교수를 초빙했었다.
당시 이 위원회의 대우는 다른기관에 비해 매우 높았고 또 새로운
미래지향적 일을 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꽤 인기가 있었다. 나는 부흥부에
있다가 60년에 보좌위원으로 이 위원회에서 잠시 일한적이 있었다.

산업개발위원회는 60~66년동안의 7개년계획을 기본틀로 하고 전반3개년
후반4개년을 나누어 먼저 전반 3개년계획을 작성하였다. 그당시
장기개발계획을 작성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경제계획에 대한
경험도 지식도 별로 없었을뿐 아니라 필요한 통계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일본이나 인도같은 나라의 5개년계획에 관한 자료들을 구해
연구하였고 국내 관계부처나 산업계 은행등에 산재해있는 자료를 모아
정리하기도 했으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여러가지 어려운 여건속에서 많은 노력끝에 60~62년을 기간으로 하는
최초의 3개년계획안이 59년 완성되어 1960년 1월 국무회의에서 통과되었다.

그러나 3개월후 4.19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이 전복됨으로써 이 계획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국무회의에서 통과된 3개년계획서는 옛중앙청
(지금의 국립박물관)구내 서편에 있는 등사실에서 인쇄중이었는데 4.19당시
데모학생들이 경무대를 향해 가다 군경과 대치하면서 등사실로 몰려들어
인쇄중이던 계획서의 상당부분이 분실되었다.

나는 이때 등사실 옆 건물인 부흥부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뛰어나가
원고를 주우려고 했으나 당시 상황으로는 도저히 계획서 전부를 챙길 수
없었다. 이런 사연으로 최초의 3개년 계획은 인쇄조차 하지못하는 운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