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경제가 급격히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찾아보고자 한다.
국내외 학자들의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그런데 외국학자와 국내학자의
견해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외국학자들은 우리나라의 산업발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그 이유를 찾아보려고 애쓴다. 반면 국내학자들은
비판적인 시각에서 조명하는 경우가 많다. 정당한 평가조차 꺼릴 때가
있다. 70년대말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어용학자라는 누명을 쓰지 않으려는
보신주의가 남아있는지도 모른다. 비판할 점을 골라서 발표해야 세론에
부합된다는 슬픈 시대의 잔재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따라서 국내에서
정당한 평가가 나오려면 21세기에나 가야 가능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다만 요즘 외국에 가서 공부한 젊은 학생들의 학위논문을 보면
외국학자에게 교육을 받은 환경 탓인지 객관적으로 보고 평가하는 경향이
두드러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재판할때는 검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변호사도 있어야 한다. 21세기가 되어서라도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이
제대로 평가만된다면 다행이겠다. 필자는 살아있는 동안 자료만이라도
남겨놓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66년 노임 대만의 절반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원동력은 여러 가지를 꼽을수 있다. 여러 논문이
발표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줄여서 세가지만 이야기하려고 한다.
사람에 관한이야기이다. 첫째는 근로자이고 두번째는 기업가와
기술자,세번째는 경제 정책 담당자의 이야기이다.

71년 한미 상공장관 회의때 가지고 간 각 경쟁국과 비교한 노임 일람표를
소개한다(표참조). 한미 상공장관회의뿐 아니라 한국투자유치회의도
있었기 때문에 준비하여 갔던 것이다. 한국사람이 열심히 일한다는 점과
노임이 싸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자료였다. 이 자료는 하루 8시간
일하는 기준으로 되어 있었다. 물론 토요일도 없다. 그래서 주6일
작업해서 48시간을 근무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한달에 평균 25일
일하는 것으로 계산이 나온 것을 보니 공휴일에도 일할 때가 있었던
것이다. 생리휴가란 꿈도 못꿀 때였다.

우리나라 사람이 세계에서 가장 부지런히 일할 때였다.

66년을 보자. 우리나라 제조업 종사자의 시간당 노임은 10센트였다.
지금 돈으로 환산한다면 80원 정도이다. 하루 8시간 일해서
6백40원,한달(25일)일해서 1만6천원(미화로 20달러)이다. 한달 월급이
1만6천원이라니 지금으로서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당시 일본의
약6분의1,필리핀 태국 대만의 2분의1수준이다. 다시 말하면 필리핀 태국이
우리보다 부자나라였던 것이다.

그런데 69년에 들어 우리나라의 임금은 시간당 18.5센트로 3년동안에 약
2배로 급등했다.

반면 다른 나라의 인상폭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더욱이 필리핀이나 태국
대만은 인상률이 높지 않았다. 임금이 안정되어 있고 따라서 물가도
안정되어 있다는 결론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노임은 이들 나라의 노임과
거의 비슷하게 되었다. 그런 추세라면 우리나라의 노임이 이들 국가보다
높아질 것이 뻔했다. 또 실제로 그렇게 되어갔다.

70년 우리나라 노임은 시간당 22.5센트가 되었으며 71년에 가서는
우리나라 노임이 더 높아지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노임이 싸다고
한 이야기는 72년부터는 못하게 된 것이다. 그후부터는 "비교적 싼"이란
표현을 쓸수 밖에 없었다.

어쨌든 우리나라 근로자는 우수한 소질을 가졌고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일했으며 저렴한 노임을 받고 일했다. 즉 국제경쟁면에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근로자였다. 이 근로자가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다음은 기업가 이야기이다. 60년대초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진정한
자본가가 없었다. 도대체 민족자본이라는 것이 있을리 없었다. 그래서
규모가 큰공장(예 충주비료공장 나주비료공장 발전소 대한조선
한국기계등)은 전부 국영기업체였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작된후
건설되는 공장도 민간이 감당하기에는 힘들었다. 그래서 제3.제4비료공장
정유공장 석유화학 종합제철등 큼직한 공장은 정부에서 지을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섬유등 수출산업이 육성되고 시멘트공장등이 건설되었으며 토목
건축산업이 발전되어 갔다. 무역업도 생겨났고 해외발주 공사도 생겨났다.

그래서 차차 민간자본이 형성되어 갔다. 정부에서 외자도입을 허가해주고
지불보증을 해주니 외국자본도 쓸수있게 되었다. 국내기업이 커져갔고
해외신용이 생기자 외국기업과 합작할수도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민간기업도 제법 큰공장을 지을수 있는 능력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들
민간기업가들은 아직은 정부에 매달려야 했고 정부시책에 적극 순응했다.
정부가 수립한 공업육성계획내에서 각기업이 맡아야할 위치와 역할을
담당했고 열심히 뛰었다. 기업과 정부는 마음을 합쳐 뛰는 협동체였다.

산업역군 긴급 양성
그래서 "한국주식회사"라는 유행어가 생겨났다. 그리고 당시는
관민협동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았다. 국가시책에 순응하고 열심히 뛴
기업가가 우리나라 산업발전의 제2원동력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기술자들의 공로도 빼놓을수는 없다. 우리나라가 공업화를
추진하던 초창기에는 기술자가 거의 없었다는 이야기는 전에 누누이 설명을
한바가 있다. 공장을 어떤 방법으로 건설하는지를 몰라서 외국업자들이
하자는 대로 했다는 이야기는 충주비료공장에서 그 실례를 들었다. 그리고
다 지어놓은 공장도 운전을 할줄 몰라서 공장운전 용역까지 외국사람에게
의뢰했다는 것도 이야기했다.

충비6개월차질 교훈
기술자들은 뼈를 깎는 노력으로 우수한 공장을 건설해 갔던 것이다.
실패한 예가 거의 없었다. 이 기술자들의 공이 대단히 컸다는 것을 꼭
기록에 남겨야 하겠다. 후진국에서는 결코 찾아볼수 없는 큰 공이었기
때문이다. 외국경제학자들도 이점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산업화 과정에서 전혀 문제가 없은 것도 아니었다. 가장
큰 애로사항은 우수한 기술자가 태부족이었던 점이다. 갑자기 공업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기술자의 수요가 늘어만 갔는데 미처 이 수요를
메울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고급기술자 양성이 급했다. 그래서 긴급대책이 마련되었다. 우선
국영기업체에서는 중역급에 기술간부 2명씩을 배치하였다. 기술이사와
공장장이었다. 이중 한명은 기술간부 후보생이었다. 빨리 교육시켜
새로운 공장을 건설할때 써야 했다. 그리고는 전국에 있는 고급기술자를
풀(Pool)로해서 필요한 인재를 필요한 곳에 배치하는 비상인사정책을 썼다.

한예를 든다. 장홍규 현 대림산업 사장은 충비출신 기술자이다.
삼비(영남화학)건설에 참여했고 공장장으로 일했다. 그때
중화학공업건설이 활발해지면서 여수에 대규모 종합비료공장인 남해화학이
건설되어 갔다. 그런데 충비공장에서 배가공장이 건설되어 공장 시운전을
하던 중 큰사고가 발생했다. 가장 중요한 장치인 컴프레서가 파손된
것이었다. 공장을 건설할때 파이프(배관)속에 남아있던 볼트가 컴프레서에
빨려 들어가 컴프레서를 완전히 망가뜨린 것이 이유였다. 공장건설후
시운전하기전에 완전 점검을 하지않은 탓이다. 복부수술하면서 배안에
수술가위를 그대로 놓은채 봉합한 꼴이었다. 그래서 충비는 이 컴프레서를
다시 주문해야 했고 따라서 6개월이상이나 공기가 늦어지게 되었다.
부족한 비료도 수입해야 했다. 간단한 실수가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래서 남해화학의 시운전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가장 믿을수 있는
공장장을 긴급배치해야 했다. 장홍규씨가 선정되었다. 남해화학은 아무
이상없이 시운전을 끝내고 정상가동에 들어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장 공장장은 손수 파이프 속에 들어가 일일이 점검을 했다고 한다. 사전에
부하직원이 점검했는데도 여러가지 이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후 여천의 석유화학공장이 건설되어 갔다. 이번에도 장공장장을
배치키로 했다. 가장 중요한 나프타 분해공장의 공장장 자리였다. 이
소식을 듣고 장공장장은 즉시 필자의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리고는 거세게
항의했다. "나(장 공장장)는 충비이후 삼비 남해화학 등 현장근무만
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던 58년부터 꼭 21년째입니다. 서울 근무는
한번도 하지 못했습니다. 남해화학 갈 때도 마지막 현장근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너무 심합니다. 자식이 없는 것도 원통한데 자식교육 문제가
없다고해서 시골에만 처박아 둘 것입니까"라고 했다.

나는 "장 공장장밖에 이 일을 맡아줄 인재가 없다"는 것을 누누이
설명했다. 옆에서 장 공장장과 서울대공대 화공과 동창인 김광모비서관도
장공장장을 달랬다. 장공장장은 할수 없이 이 일을 맡게 되었고 성공적인
시운전을 했다. 시운전은 너무나 순조로워 시운전이 공장 정상가동으로
맞바로 이어졌다.

여천석유화학 나프타 분해공장의 소유주는 민간기업체인
대림산업(주)이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런 보완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이 공장은 민간기업이지만 국가의 기간공장이었기에 실패해선 안됐던
것이다(관민협동의 본보기).

대림산업(주)측은 장공장장의 공을 인정하고 공장가동이 정상으로
들어가자 약속대로 전무로 승진시켰고 서울 본사에서 근무토록 했다.
그리고 현재 그회사의 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장공장장의 경우는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기술자가 국가경제 개발의
중추적 역할을 맡아 그 책임을 다했다. 박대통령은 공장시찰을 할 때면 꼭
공장장에게 브리핑을 시켰고 공장장과 기술자및 근로자를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기간산업의 기술이사 공장장의 임명은 꼭 박대통령에게 보고된 후
결정되었다.

당시는 국영기업체 사장을 거의 퇴역장성이 차지하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공장건설 경험이 없었다. 그런데도 거대한 공장들이 차질없이
건설되고 성공적으로 가동됐던 것은 이들 기술자의 공이 컸기 때문이다.
박대통령이 직접 관심을 쏟은 기술이사 공장장 인사이니 각 회사 사장도
공장문제에 한해서는 마구 이래라 저래라 하지 못했다. 이런 의미에서는
박대통령의 용인술이 절묘했다는 결론이다.

정책담당자들도 전력
경제정책 담당자에 관해서는 우선 전에 인용한 일본책 "현대
한국경제분석(도변이부 저)"에 나와있는 글을 소개한다.

"기술 자본 숙련노동등의 결함요소를 해결하고 전략산업부문의 설정과 그
육성을 이룩한 한국정부의 공업조직자로서의 기능은 걸출했다"라고
적혀있다. 나는 여기서 공업조직자를 단순히 정부가 아니라 박대통령을
위시해서 장차관 공업정책수립과 집행을 담당한 각급 공무원,그리고 이를
협조한 각단체 기관 학자 전문가를 총망라한 집단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이 집단이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세번째 원동력인 것이다.

지금부터는 이 "공업조직자"들의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여기서는 우리나라의 경제를 실제로 움직인 총수에 대한 이야기만 쓰기로
한다.